문화뉴스 아티스트 에디터 강해인 starskylight@mhns.co.kr
영화를 보고, 읽고, 해독하며 글을 씁니다. 좋은 영화는 많은 독자를 가진 영화라 믿고, 오늘도 영화를 읽습니다.

[문화뉴스 MHN 아띠에터 강해인] 오르되브르는 정식 식사에 앞서 식욕을 돋우기 위한 음식입니다. [영읽남의 오르되브르]는 관람 전, 미리 영화에 대해 읽어보는 코너입니다.

폭행을 당한 여성이 직접 가해자를 찾는 '엘르'는 불균질한 기운이 넘실대는 영화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불균질은 불편함으로 이어지고, 관객의 기대와 이해를 넘어서기도 한다. 선과 악, 정의와 규범의 잣대로 바라보기엔 너무도 혼란스러운 영화. '엘르'는 그런 영화이고, 주인공 미셸(이자벨 위페르)은 그런 인물이다.

연기로서 더 쌓을 커리어가 없어 보이는 배우. 국내엔 홍상수 감독의 작품('다른 나라에서', '클레어의 카메라')에 출연해 유명한 배우, 이자벨 위페르가 미셸을 연기했다. 성폭행 장면으로 시작하는 '엘르'의 미셸은 일반적인 피해자와 달리 무던히, 의연히 삶을 지속한다. 더 특이한 건, 그녀는 공권력이 아닌 사적인 방법으로 범인을 찾으려 한다. 약자로서 각인된 '여성' 혹은 '피해자'라는 프레임을 거부한 이 독특한 인물은 어떻게 규정하기도 힘들다. 덕분에 서사의 진행은 보편적 관객의 기대를 거의 배반하고, 이자벨 위페르의 연기 덕에 심연은 더욱 깊어간다.

 

 

'엘르'는 스릴러의 일반 서사(범행-추리-해결)를 따르지만, 일반적인 해결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더불어 피해자가 피해자로 규정되기를 거부한 이 영화의 기이한 힘은 관객을 독특한 지점으로 안내한다. 이 복잡한 영화 안에서 길을 헤맬지도 모를 관객을 위해 작은 관람 포인트를 제시하고자, 앞서 영화를 관람한 영알못의 의견을 조금 빌려왔다.

영알못의 600자 리뷰엔 "'미셸'은 모든 씬에서 주체가 되어 단 한 번도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았다"라는 문장이 있다. 여기서, 주도권이라는 코드는 꽤 흥미로운데, 이는 미셸이 추구하고자 하는 일관된 목표였고, 그녀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더 나아가면 그녀의 생존 방식이기도 했다.

 

 

그리고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엘르'는 미셸이 성폭행 '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는 그녀가 주도권을 잃은 상태로 프레임에 입장했다고 볼 수 있다. 늘 주도권을 잃지 않으려는 그녀가 주도권을 잃은 상태로 등장했다는 건 역설적이며, 영화 내내 균열을 일으키는 지점이 된다. 성폭행 피해자라는 '주도권을 잃은' 상황에서 미셸이 추구한 것이 무엇인가. 이 역전된 주도권의 변화 양상에 집중해서 보면, '미셸'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여기에 조금 덧붙이면, 성적 충동, 즉 '섹스'라는 창을 통해 미셸을 관찰하면 역시나 일관된 무언가를 하나쯤 발견할 수 있다. 금기를 초월한 인물의 욕망, 그 솔직하고 자유로운 모습이 하나의 길잡이가 되어 '미셸'과 '엘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혹은, 굳이 모든 걸 이해하려 하지 말고, '엘르'의 불균질한 정서 그 자체를 즐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다. 여러모로 '엘르'는 관객의 정서를 뒤흔들어 놓는다는 점에서 무서운 영화고, 즐길 방법이 많아 어려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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