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면 말을 참 잘 듣게 된다.

[글] 문화뉴스 아띠에터 송수진 artietor@mhns.co.kr
사람이 살아가는 힘은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연극인, 연출 송수진입니다. 극단 묘화 대표.

[문화뉴스 MHN 아띠에터 송수진]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대해 누구보다 민감한 나라 미국에서 2004년 이야기만 들어서는 믿기지 않는 사건이 발생했다. 

3명의 어른이 1명의 미성년자를 둘러싸고 만들어낸 사건 '보이스 강간'이다. 보이스 피싱은 알았어도 '보이스 강간'이 뭔가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분명 심각한 사회문제로서 이야기되던 사건이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고 그 당시에도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뒤에 '강간'이었으니 말이다. 

자극적인 이슈 '보이스 강간', 왜 그러한 일이 벌어졌나 보다는 '미성년자'와 3명의 어른이 한 행위들이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얼마 안 가서 잊혔다. 사건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내 일이 아니면 외면하는 바쁜 어른들이자 타인의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공연을 본 사람들의 공연 평에 정확히 나와 있었다. '불편하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 사건에 대해 '불편하다'라는 감정이 먼저 표출된다. 이 부분에 대해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 극에서 다루고 있는 사실들은 어른들이 보기엔 매우 불편한 사실이니 말이다. 

 

실제 사건에 모티프를 두고 만든 말 잘 듣는 사람들의 배경은 한국의 명가 삼계탕이라는 가상의 체인점이다. 체인점의 특성상 고객과 매출에 대해 매우 민감한 사항들로 인해 매니저와 직원들은 언제나 고객과 사장 사이에서 눈치를 보는 입장이다. 특히나 중학생 딸을 두고 있는 매니저 같은 경우 사장에게 밉보여 직장 내에서 위치가 흔들리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하는 사람이다. 나머지 사람들도 각자의 생활과 사정이 있을 테지만 사람이 절실하게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사람들은 쉽게 꼬투리를 잡히기 마련이다. 미성년자인 예슬이처럼 말이다. 

아직 부모의 울타리 속에서 보호받아야 할 어린 친구지만 아픈 엄마와 소송 중인 아버지로 인해 어른들의 세계에 먼저 발을 내디뎠다. 아르바이트로 미리 겪는 사회생활 속 예슬이는 호칭 문제에서 부터 부담스러운 동료직원의 관심까지 많게는 아니더라도 어느 하나 그냥 넘어감 없이 자기 할 말은 다 한다. 이러한 모습이 어른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권위를 무시당하는 것 같아 예슬이를 고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는 것이었다. 자신들 역시 언제나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의 강압적 권위 속에서 살아왔기에.

나이는 지위이고 권위이자 곧 권력으로 인식되어 '예' 이외의 대답은 말대답이고, 버릇없는 것이며 자신을 무시한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강압적 권위 속에서 어쩌면 '보이스 강간'이 시작되기 전에 사건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권위' 앞에 반기를 드는 '상식' 그리고 '나이 어린 여자아이'. 목소리로 모두를 농락한 '보이스 강간범'의 이유는 없다. 나오지 않았고 예측하기도 어려웠다. 왜? 왜? 불특정 다수를 그렇게 농락했을까? 이러한 의문이 들기에 어른의 말을 듣는 게 상식이라고 시종일관 외치고 강압적 태도로 복종을 요구하는  모습이 더욱더 불쾌하고 극을 끝까지 보기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보이스 강간범'은 형사라는 공권력을 들이댔고 미성년자인 예슬이에게 은근히 어른으로서의 권위를 들이밀었던 어른들은 그 공권력의 권위 앞에 처참하게 무릎 꿇었다. 보이지도 않고 실제로 위협을 가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어른들은 공권력의 권위 앞에 자발적 협박을 당하고 폭력을 행사했으며 상식적으로 보호받아야 할 아직은 '어린 여자아이'인 예슬이에게 언어적 폭력과 육체적 학대를 가했다. 

자신이 자발적으로 실토한 죄목으로 협박당하며 자신의 위치가 흔들리지 않게 하려고,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아직 '어린' 여자아이였던 예슬이를 점차 거리낌 없이 협박하고 학대했으며 '보이스 강간'이 원활하게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줬다. 아무도 이 어린것을 끝까지 지켜줄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것은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공권력이라는 권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사람들… 심지어는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데도 자발적으로 무릎을 꿇고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며 배를 뒤집어 까는 '어른들'. 무작정 흔들어 대는 꼬리 앞에서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 단지 지켜야 할 것이 많아서라고 이야기하기에는 예슬이를 향한 어른들의 폭력적인 행동들은 설명하고 이해받기 어렵다.

우리가 어릴 적 배웠던 도덕과 윤리, 살아오며 배워왔던 사회적 정의는 도대체 언제야 쓸모가 있는 것일까? 불편해하는 관객을 향해 김수정 연출은 마지막 방점을 찍는다. 

 

연극 '말 잘 듣는 사람들' 출연 배우들 ⓒ 극단 신세계

마치 마지막인 듯 거울 뒤에서 '보이스 강간범'이 나오고 피날레를 장식하는 배우의 모습으로 양팔을 관객을 향해 펼치자 무의식중에 관객들은 그 '보이스 강간범에게 손뼉을 치고야 만다. 연출이 의도한 관객들의 행동이었다면 정말 연출에게 손뼉을 쳐주고 싶었다.

왜냐하면, 엉겁결에 손뼉을 친 내 손목을 잘라버리고 싶었으니 말이다. 그러고 나서 '보이스 강간범'은 당당하게 객석으로 가서 앉았고 이 모든 것들을 관객과 함께 마치 처음부터 지켜본 듯 아무렇지 바라보았다. 앞서 이야기했던 한 가지 사건에 대해 자극적 이슈에 대한 관음증적 시선만이 남아버린 대중들을 더욱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보이스 강간범'을 거울삼아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한 연출의 의도로 보인다. 필자는 그 부분이 가장 인상 깊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조금 아쉬웠던 부분은 텍스트와 언어에서는 명확히 보이는 관계성이 인물과 인물의 만남이 이루어졌을 때 관계성의 다양화가 보였다면 전체적 사건의 부각이 더욱더 크게 다가왔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의 관계성을 보여주는 것만큼 그 사건과 명확한 이유와 인물 각자의 목적성이 더 주목받아 보이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기에 말이다. 

하나 김수정 연출의 '말 잘 듣는 사람들'의 구성과 짜임새는 정말 탄탄했다. 실제를 모티프로 하여 자신이 사회에 하고 싶은 말을 이렇게도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을까? 가끔은 연출들이 자신의 의지가 너무 강해 공연을 보면 작품도 배우도 안 보이고 연출만 보이며 심지어는 배우들이 마리오네트로 보이는 경우가 있다. 관객들에게 느껴지지 않는 감동을 강요하며 느끼지 못했다면 너는 예술의 문외한이라 외치며 말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달랐다. 김수정 연출은 자신의 의도를 작품 속에서 배우가 가져가야 하는 선과 관객이 느껴야 하는 선을 넘지 않고 이렇게나 명확하게 전달하였다. 너무나도 겸손하고 멋진 행동이었다. 서울연극제를 통해 만난 극단 신세계의 '말 잘 듣는 사람들' 이후의 작품들이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기대된다.

주요기사

 
저작권자 © 문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