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뉴스 아티스트 에디터 강해인 starskylight@mhns.co.kr 영화를 보고, 읽고, 해독하며 글을 씁니다. 좋은 영화는 많은 독자를 가진 영화라 믿고, 오늘도 영화를 읽습니다.

[문화뉴스 MHN 아띠에터 강해인] [영읽남] '언노운 걸'…소녀의 죽음과 네 번의 날갯짓 ①에서 이어집니다.

 

또 하나의 죄책감

'언노운 걸'은 제니를 중심으로 두 개의 사건이 일어나고, 제니가 그걸 해결하는 이야기다. 하나의 사건은 지금까지 글에서 언급했던 이름 없는 소녀의 죽음이고, 다른 하나는 인턴인 줄리안의 이탈이다. 줄리안은 영화의 시작과 함께 제니에게 반항적으로 행동하고, 사건이 일어날 때 병원을 떠나 돌아오지 않는다. 흥미롭게도 소녀의 죽음에서 용의자가 보이지 않듯, 줄리안의 이탈에도 명확한 이유가 제시되지 않는다.

 

 

줄리안의 이탈에서 죄책감을 느끼는 것도 제니다. 그녀는 평소 줄리안에게 갑질을 했고, 구박을 너무 많이 했다는 사실을 종합해 그가 도망간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생각한다. 어렵게 걸어온 의사의 길을 좌절시킨 게 자신이라는 것에 자책한다. 다르덴 형제 역시, 의도적으로 짧은 시간 내에 제니의 구박과 잔소리 장면을 집어넣어, '언노운 걸'을 보는 관객도 '제니'가 문제를 제공했다고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진실은 그와 달랐고, 역시나 제니'만'의 문제가 아님이 밝혀진다. 줄리안에겐 어릴 적에 겪은 일 때문에 트라우마가 있었고, 그것이 일리아스라는 소년의 발작을 보며 깨어났다. 이번에도 제니만 책임을 져야 할 문제가 아니었지만, 그녀의 죄책감만 집요하게 작동하며 줄리안의 마음을 돌리려 한다. 그녀의 노력 덕에 줄리안은 트라우마를 이기고 다시 의사로 복귀하는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소녀의 이름을 찾는 순간, 줄리안도 복귀했다는 점에서 두 가지 서사는 함께 갈등하고, 함께 해결됨을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사건의 교집합이 제니이고, 죄책감이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병균 취급을 받는 제니

제니는 긍정적 결과를 만들어 내지만, 거기에 도달하기까지 그녀를 보는 공동체의 시선은 절대 긍정적이지 않다. 제니는 많은 이들이 잊고 지냈고, 잊으려 하는 일을 들춰내 불편하게 했다. 소녀의 이름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처럼, 죄책감도 꺼내고 싶은 감정이 결코 되지 못한다.

일단, 제니를 이해하는 인물이 없다. 그녀는 더 좋은 자리로 이직할 수 있었지만, 소녀의 죽음을 방관한 뒤 그 자리에 그대로 남는다. 그런 제니에게 주위의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시선을 던진다. 이는 '나라면 나의 이익을 좇을 텐데, 굳이 전혀 이익이 되지 않는 일에 얽매여야 하나'고 묻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문이 누적되어 불쾌함의 표현으로 이어진다. 공동체는 불편을 감수할 만큼 관대하지 못 했다.

경찰마저도 제니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경찰의 태도를 공무집행을 위한 균형 잡힌 태도로 보기 힘든 건, 죽은 소녀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 탓이다. 제니는 경찰에게 소녀가 매장되는 날을 꼭 알려 달라 했지만, 경찰은 바쁘다는 이유로 이를 잊는다. 죽음이란 거대한 문제가 바쁜 일을 핑계로 무시된 것이다. 누구의 죽음이 그리 쉽게 무시될 수 있는 걸까.

불쾌함은 더 나아가, 제니는 주치의 자리까지 박탈당하며 경제적 피해를 본다. 제니는 불쾌한 시선을 받던 것에서 더 나아가, 더 고립된다. 사실 브라이언 아빠가 주치의를 바꾸겠다는 건 그로서는 당연한 선택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건, 브라이언의 엄마가 제니를 대하는 태도다. 그녀는 제니를 정신적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취급한다. 한 소녀의 죽음에 책임감을 느끼고 노력하는 열의는 정신병이라는 낙인으로 돌아왔다. 제니는 공동체에 죄책감과 불안감을 퍼뜨리는 병균 취급을 당한다.

끝으로 이 단계를 더 나아가면 물리적 폭력이 있다. 사이버 카페의 두 남자는 소녀의 죽음을 그만 들추라며 둔기로 차를 치고 협박한다. 그리고 끝까지 진실을 요구하는 제니에게 화가 난 브라이언은 제니를 구덩이에 밀어 넣으며 물리적 힘을 행사한다. 그렇게 제니는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면서 부당한 정신적, 육체적 폭력을 겪어야 했다.

'언노운 걸'의 카메라는 이런 제니의 고립과 위태로움을 성실히 담는다. 죄책감의 시작점인 병원에서 생활하는 제니는 늘 불안해 보인다. 카메라는 제니의 상황을 프레임에 담으면서, 그 주변의 공간을 넓게 보여주지 않는다. 큰 크기의 샷이 없기에 제니 옆에서 뭔가 튀어나올 것 같은 불안감이 늘 존재한다. 누구도 범인의 위치에 설 수 있기에, 그녀 홀로 있는 순간은 늘 불길함이 감싸고 있다. 그리고 별다른 음악이 없는 영화이기에 작은 소리에도 관객이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병원에 울리는 벨 소리는 유독 크고 공포감을 준다.

 

 

집요한 개인이 완성하는 공동체의 회복

이런 위태로운 상황과 그를 적절히 담은 카메라 덕에 진실을 좇고 소녀의 이름을 되찾아 주는 제니의 여정은 더 두드러진다. 그녀의 집요함은 많은 걸 제자리로 돌려놨다. 가해자를 가해자의 위치에 세웠다. 꺼내지 않던 죄는 까발리고 당연히 느껴야 할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죄를 직접 시인하게 했다. 늦기는 했지만, 소녀의 언니에게서 동생과의 감정적 교감을 끌어내는 데도 성공했다. 그리고 의사가 될 인재를 복직시켰다.

이 모든 게 한 사람의 행동에서 출발했다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다르덴 형제가 공동체 속의 개인에게 보내는 메시지이다. '한 사람이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다' '언노운 걸'은 단 한 사람, 제니의 힘으로 사회를 정상화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유도한다. 한 명의 죄책감이 만든 책임감은 모든 구성원에게 확산되어 살만한 공동체의 근간이 된다.

인간이기에 가지는 게 죄책감이라면, 이 글에서 지속해서 쓴 '죄책감'이라는 단어를 인간성이라 바꿔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다르덴 형제는 한 여인의 용기 있는 행동을 통해 죄책감, 다시 말해 인간성을 느끼기를 바랐다. 이름 없는 소녀에게 이름이 돌아왔듯 사회에 결여된 인간성이 회복되길 바랐다.

켄 로치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시스템 속에 소외된 인간을 다뤘다면, 다르덴 형제의 '언노운 걸'은 서로를 소외시키는 사회 구성원들에게 말하고 있다. 가까운 시기에 도착한 영화에 큰 감흥을 느끼게 되는 건, 새로운 정부의 시작과 맞물리는 시점 덕이다. 이 두 가지 영화는 새로운 사회를 여는 우리에게 뭔가를 깨닫게 해줄 것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공직자들에게, 그리고 '언노운 걸'은 일반 시민에게 더 좋은 사회에 대해 질문하게 할 것이다. 그래서 두 영화를 권한다. 제니 한 명이 '인간성'을 퍼뜨렸듯, 순진할지라도 영화 한 편의 힘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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