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뉴스 MHN 서정준 기자] 2016년 5월 17일 아무 잘못 없는 여자가 '여자라서' 죽었다.

여성들을 위하며 그녀를 위한 추모로 바칠 이야기를 하기에 뮤지컬은 아주 어려운 장르다. 뮤지컬은 공공연히 남자들의 장르였기 때문이다. 여성혐오를 이야기하기 이전에 아직 여성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장르라고 볼 수 있다. 마치 다들 잊고 있지만, 한국에서 가장 소외된 약자 계층이 장애인인 것과 같은 현상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여자 캐릭터는 누군가의 딸, 엄마, 아내, 연인이어야만 극의 비중이 정해지며 이러한 사실 자체는 '극의 완성도', '극의 재미', '개연성 있는 스토리' 등의 당위성 앞에 힘을 잃고 모두 알고 있지만서도 기억 속에서 지워진 듯 했다.

단적인 예로 영화에서 '매드맥스'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여성 영화, 혹은 여성 캐릭터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고 연극도 뒤늦지만 그만큼 다양한 시도와 성희롱 예방교육 등을 통해 억눌려 왔던 예술계 성폭력을 공론의 장으로 끌어올리려고 애쓴 바와 달리 뮤지컬은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난 1년 간의 작품들 중 조금이나마 여러 가지에서 의미 있는 작품들을 끄집어내 보는 것이 이러한 논의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왜냐면 앞서 말한 바와 같은 문제가 점차 나아지는 기미를 보였기 때문이다.

1. 2016 창작산실 우수신작의 여풍. '레드북', '경성특사'

2016 공연예술 창작산실 우수신작 릴레이 공연으로 선정돼 공연했던 뮤지컬 '레드북'은 대중성과 예술성을 아우르는 완성도로 호평받으며 동시에 한국 뮤지컬계가 나아갈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작품이었다.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의 여주인공을 미러링한듯한 남주인공 브라운의 모습부터 야한 상상을 좋아한다는 도발적인 설정과 함께 어떤 위기에서도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여주인공 안나는 멋진 남성 캐릭터와 그를 기다리는 순진무구한 여주인공의 관계에 지친 관객들을 위로했다. 심지어 기존 뮤지컬에서 여성 캐릭터의 비극성을 강화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던 수단 중 하나인 성폭력이 벌어질 위기에서도 그녀는 멋지게 딕 존슨의 거기를 걷어차버리고 빠져나온다.

반면 안나가 보여주는 캐릭터도 '남자가 보기에 당찬 여성'을 표현했다거나,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미러링에 그친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도 함께 있었다. 하지만 분명히 한국 창작 뮤지컬계를 말할 때 의미있는 작품이 될 것으로 보인다.

▲ 뮤지컬 '레드북'

또 함께 우수신작으로 공연됐던 '경성특사' 역시 주목할만 하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비밀결사'를 원작으로 한 작품은 2010년대 한국을 빗대어 표현하기 쉬운 경성시대로 배경을 옮겨 자유의 상징인 재즈 음악 위에 주인공들의 모험을 얹어 놓았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은 자기의 성씨를 싫어해 자신을 '이옥'으로 칭하는 여주인공 윤이옥이었다. 취업난을 이기기 위해 택시 기사에 도전하는 등 놀라운 행보를 보여준 그녀는 작품 속에서도 내내 능동적으로 극을 끌고 가며 활약한다.

▲ 뮤지컬 '경성특사'

2. 아직도 변하지 않은 현실. '콩칠팔 새삼륙 ; 퍼-플 시대'

2016 창작산실 창작뮤지컬 우수재공연 제작지원 선정작인 '콩칠팔 새삼륙'은 1931년 4월 영등포역 기차선로로 뛰어든 홍옥임과 김용주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팩션 작품이다.

제목답게 타인을 가십거리로 소비하는 시대에 남 부러울 것 없던 두 여인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조명한다.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로 해석된 초연을 이어 받아 재연에서는 '퍼-플 시대'란 부제와 함께 LGBT의 사랑, 정치적인 관점 등이 새롭게 들어갔다. 본 기사의 발단이 된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서프러제트 관객 폭행 사건 등 한층 여성혐오가 화두가 되던 시기인 만큼 당연한 변화일 수도 있다.

다만 넓어진 포커스 때문에 극 자체의 의미는 더해졌지만, 재미 면에선 크게 나아졌다는 평을 받지 못했다. 의미만으로도 공연의 가치가 충분할 수도 있는 여타 장르와 달리 여러 배우와 제작진이 모여 대중에게 다소 높은 금액에 판매하는 상품인 뮤지컬이 가진 의미와 한계를 동시에 드러낸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 뮤지컬 '콩칠팔 새삼륙 ; 퍼-플시대'

3. 도대체 왜? '페스트'

뮤지컬 '페스트'는 프랑스의 천재 작가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를 원작으로 하고 한국의 천재 아티스트 서태지의 노래를 덧입힌 주크박스 뮤지컬이다.

'페스트'는 지나치게 긴 제작 과정 중 여러 차례 흔들리며 길을 잃은 채로 무대에 올라 대중에게 크게 사랑받지 못했지만, 제작사가 처음부터 적극적인 피드백을 하기로 결정하고 빠르게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며 재연이 올라온다면 더 나아진 작품이 되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게 만들었던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나 훌륭한 배우들의 연기와, 김성수 음악감독의 내공을 보여준 웅장한 음악으로 가릴 수 없던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으니, 남자였던 '타루'의 성별을 여성 식물학자로 바꿔 등장시킨 것이다. 이는 극의 완성도와 별개로 리유와 타루의 러브라인을 전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며, 여성 캐릭터의 가치를 현재 한국 창작 뮤지컬계에서 어느정도로 생각하는지 보여준 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 뮤지컬 '페스트'

물론 남자 주인공이 멋진 미래를 위해 희생하고 여자 주인공이 그를 그리워하는 것과 달리 마지막까지 본인의 정의를 실천하다 죽어간 타루의 캐릭터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성별을 바꿀 필요는 전혀 없는 일이었다.

또 '페스트'에서는 악역 코타르는 마지막까지 본인의 기준을 잃지 않는 카리스마 있는 악당으로 그린 반면, 또다른 악역 '리샤르'는 형편 없이 당하고, 더 강한자의 도움을 받으려고 애를 쓰다 뜻대로 되지 않자 무기력하게 패배하는 형태로 그리기도 했다. 필요 이상으로 괴로운 모습을 연출하며 안타깝게 죽는 '잔'도 보기 안쓰러웠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스토리의 전개에 따라 벌어진 일이지만, 놀랄만큼 '페스트'는 여자들만 걸렸다.

4. 시대를 앞서갔거나, 그때도 똑같았거나. '빨래'

뮤지컬 '빨래'의 19차 프로덕션이 지난 3월 동양예술극장 1관에서 시작됐다. 임강성, 조상웅, 박지연, 신고은, 나하나 등 대극장 작품에서 주로 만날 수 있던 화려한 캐스트도 이 작품을 보게 만드는 요인이지만 '빨래'의 진짜 강점은 사회 밑바닥의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점이다.

최근 연이은 강력범죄의 대상으로 이슈가 된 '혼자 사는 젊은 여성'이 주인공이며, 그녀와 사랑에 빠지는 사람은 '몽골 출신의 공장 노동자'다. 또 매일 같이 동거남과 싸우는 여성. 장애를 가진 딸을 데리고 혼자 사는 할머니까지. 다른 작품에선 정말로 보기 힘든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를 다루는 방식은 더더욱 매력적이다. 그녀들은 사장의 해고 압력에 '멘붕'한 나영이에게 막연하게 '참다 보면 좋아진다'거나, '왕자님이 구해주러 온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삶이 다 그런 것이니 힘든 건 빨아버리고 먼지 따위 툴툴 털어내자며 위로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나이 많은 여성이 자신의 꿈과 희망을 말하지 못하는 기존의 관습을 가볍게 깨버리는 것도 물론이다.

▲ 뮤지컬 '빨래' ⓒ씨에이치수박

5. 어째서 클래식이 될 수밖에 없는지. '위키드'

지난 여름 재연을 올린 뮤지컬 '위키드'는 아름답고 훌륭한 넘버, 엄청난 스케일의 무대, 오즈의 마법사를 비튼 이야기 등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작품이면서 여전히 동시대에서 가장 여성혐오를 정면으로 부딪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관습적으로 구조화한 남성 2명-여성 1명의 삼각관계를 깨버리기도 했고 '브로맨스'라고 불리며 흔히 남성들에게만 있는 것으로 여겨지던 친구 사이의 우정을 막연하게 긍정적으로만 풀지 않고 서로에게 가진 질투 등의 복잡한 감정까지 제대로 조명했다.

글린다와 엘파바에게 피예로가 어떤 동기로 작용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남성의 구애를 바라며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둘의 모습 역시 수동적이고 전형적인 인물에서 벗어났다.

더욱이 이런 맥락이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고, 충분한 개연성에 의거해 진행된다는 점이 극의 최대 장점이다. 시간이 지나도 빛이 바라지 않을 작품이 '클래식'이라고 한다면 '위키드'는 분명히 클래식한 작품일 것이다.

▲ 뮤지컬 '위키드' ⓒ 클립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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