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뉴스 MHN 장기영 기자] 2016년 5월 17일 이후. 세상은 얼마나 달라졌고, 나의 세계는 어떤 변화를 겪어야 했는가.

지난해 5월, 강남역에서 한 여성이 끔찍하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의 가해자는 '피해자가 여성이었기 때문'이라는 가해 동기를 밝혔다. 또한 가해 범위를 '여성'으로 한정시킨 이유에 대해서는 '평소에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라고 답했다. 

사건 보도 이후, 수많은 여성들은 이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라 주장하며, 스스로 피해자가 되지 않는 '우연을 겪었다'라는 표현으로 분개와 애달픔을 게워냈다. 곧이어 여성으로서 겪어야 했던 각종 차별의 일상이 곳곳에서 고백되어졌다. 이후 '페미니즘'은 여성들의 삶뿐만 아니라, 우리가 일상으로 치부하며 인식하지 못했던 가장 보통의 사회 현상에 대입할 수 있는 패러다임이 됐다. 

문화예술계 또한 '예술'이라는 미명 아래 묵살되거나 묵과해야만 했던 문제들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본지는 5.17 강남역 살인사건 1주기를 맞아, 지난 1년간 연극계에서 벌어졌던 젠더 폭력 사건 혹은 페미니즘 관련 작품들에 주목했다. 

 

연극 '청춘예찬' 공연사진 ⓒ 나인스토리

1. 시대는 변하지만, 연극은 그대로? '청춘예찬'
1999년 초연 당시 백상예술대상 희곡상, 동아연극상 희곡상, 한국연극협회 신인연출상, 청년예술대상 희곡상 등의 화려한 수상 이력을 남겼던 연극 '청춘예찬'. 지난해 12월 '청춘예찬'은 아트포레스트 개관 기념 첫 작품으로 선택되며 다시 관객들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여성들의 시선과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이 변해야 하고, 실제로 변하고 있는 시점에서 '청춘예찬'은 관객들에게 '현재의 시점을 간과하며 과거의 청춘을 묘사했다'는 평을 받았다. 

극중 여성들은 부수적이고 수동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남성에 의해 폭력적으로 다뤄지는 여성의 모습이 비일비재하기도 하다. 극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는 단 3명. 주인공의 어머니, 못생긴 여자, 예쁜 여자뿐이다. 여성 인물들에게는 '개성'대신 '전형'이 부여됐다. 이들은 남성의 폭력에 저항할 수 없고, 심지어는 남성의 권위에 순종할 뿐이다. '재원 모'는 남편의 폭력을 견디며 살다가, 결국에는 염산을 눈에 맞아 장님이 됐다. 이후 안마사로 일하며 재혼하지만 여전히 전 남편의 경제적 형편을 책임진다. 또한 간질병을 앓고 있는 여성은 재원과 하룻밤을 보낸 뒤 같이 살자고 매달린다. 

여성 관객들은 여성인물이 남성인물 혹은 권위적 존재로부터 박해받는 장면을 관습적으로 삽입하는 연극, 곧 여성인물을 주체적 인물로 다룰 능력이 부족한 연극들에 질려버렸다. 시대가 변하는 만큼 연극도 변해야 하지 않을까. 동시대성은 언제, 어디서나 연극이라는 장르가 안고 가야 하는 필수적 특징이기에.

 

 

2. 배제돼 온 페미니즘 연극, 저항의 몸부림 시작하다. '페미리볼버'
5월 중으로 서계동 국립극단 마당(소극장 판, 백성희장민호극장 사이)에서 페미니즘 야외 게릴라 공연 '페미리볼버'가 진행된다. '페미리볼버'는 지난 2일 개최된 토론회 '젊은 극작가들의 창작 환경과 공공극장의 역할 – 국립극단 '작가의 방' 사태를 넘어서'에서 공개됐던 공연이다. 

작년 국립극단 '작가의 방 낭독극장'서 페미니즘 연극 '김치녀 레볼루션'을 공연했던 김 작가는 이번 공연 의도에 대해 "국립극단 '작가의 방' 사태의 많은 면면 중 잘 드러나지 않은 사안이지만 '페미니즘' 작품이 최종 선정에서 배제된 것에 대한 저항 공연"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발언을 통해 연극계의 페미니즘 및 젠더 이슈 연극의 결핍을 인식할 수 있다. 공공극장 뿐 아니라 여전히 대학로의 수많은 극장들은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김 작가는 "국립극단을 비롯한 대학로의 모든 극장은 예술가들과 관객들의 것"이라며 "대학로에는, 우리에겐, 더 다양한 목소리가 필요하다. #페미리볼버 공연이 그 다양성의 불씨 중 하나가 되어 타오르고 싶다"고 말한다.

연극계가 남성 중심 서사에 사로잡혀 권위적이고 마초적인 분위기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며, 이에 대해 유쾌하게 저항하는 김슬기 작가. 그의 이번 게릴라 공연은 관객 참여형으로 이뤄지며,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 등 SNS로도 동시 생중계된다. 관람을 원하는 독자는 revolver2017@naver.com으로 메일을 보내 공연일자를 답장으로 받아볼 수 있다.

 

2017 남산예술센터 시즌 프로그램 소개 기자간담회 ⓒ 문화뉴스 DB

3. 공공극장 최초 성희롱 예방교육 실시, '남산예술센터'의 의미 있는 첫 걸음.
지난 3월부터 남산예술센터가 2017 시즌 프로그램을 함께 하는 협력극단 및 극장의 모든 스태프를 대상으로 삼는 성희롱 예방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공공극장 최초로 시행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올해 약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되는 성희롱 예방교육 프로그램의 첫 시간은 한국여성민우회 관계자의 강연으로 구성됐다.

작년 한 해, SNS를 통해 '#예술계_내_성폭력'이라는 단어가 문화계 전반의 큰 화두가 됐지만, 정작 '#연극계_내_성폭력'는 언급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연극 현장 내 성폭력 문제는 피해 사례 발언뿐 아니라, 관련 발언 자체가 침묵 되는 현상으로 이어졌는데, 이에 대해 연극계 한 관계자는 '피해자의 발언 위험성이 비교적 높은 현장 분위기가 원인'이라 밝혔다. 

남산예술센터 관계자는 프로그램의 취지를 "제작현장에서의 관련 사례들을 수집하며 성희롱에 해당하는 언행을 공유하는 자리가 될 것 같다"며 "연극계 현장에서 통용될 수 있는 예절 매뉴얼을 만드는 게 목표다. 서로를 존중하고 예의를 지킬 수 있는 문화를 만들고자 한다"라고 전했다. 

지속적인 집단 작업, 가족적 분위기 등의 현 연극 작업 현장은 성폭력 피해 사례를 '덮어야 할 것' 혹은 '별 것 아닌 일'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일관되게 대응해왔다. 그러나 남산예술센터의 성희롱 예방교육은 기존 연극계에 자성적 자세를 요하는 시공간이 당도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더 이상 '(사회를 위한)연극'이라는 미명 아래 폭력을 묵인해야 하는 '약자들의 희생'이 요구돼선 안 된다는 것이다. 대사회적 발언은, 그 발언의 주체가 되는 집단 내 개개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돼야 할 것이다.

 

 

4. '크지는 않지만 작지도 않게', 이외의 페미니즘 연극들 
앞서 언급된 게릴라 연극 '페미리볼버' 외에도, 지난 1년간 '페미니즘'을 주제로 하는 연극들이 공연돼 왔다. 크지는 않지만 작지도 않았던 이들의 목소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됐다. 

우선, 지난 2월 17, 18일 양일간 서울 성북구 삼선교로에 위치한 극장 봄에서 연극 '아주 친절한 (페미니즘) 연극'이 공연됐다. 연극은 페미니스트가 아닌 관객을 주요 대상으로 삼아, 유독 필요성과 실효성을 의심받는 운동인 '페미니즘'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했다. 지난 3월 1일부터 5일까지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에서는 '페미수제 연극: 메이크업 투 웨이크업'이 공연됐다. 연극은 외모 강박이 여성의 몸과 자아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한다. 기획 제작을 맡은 '사막별의오로라'는 2014년 김애란의 단편소설을 각색한 '큐티클-불안의 몸'에서 몸을 다듬는 작은 소비(네일아트)를 통해 삶의 불안을 해소하려는 현대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바 있다. 

지난달 21일부터 30일까지는 서울 남산예술센터에서 연극 '가해자 탐구_부록: 사과문 작성 가이드'가 공연됐다. 연극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시선에서 성폭력의 역사를 기록했다. 이들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당당하고 '예술가'이기 때문에 용인될 수 있었던 '가해자'의 시선으로 가해의 기록마저 가해자에게 독점되고 마는 권력과 위계의 구조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key000@mhns.co.kr

주요기사
관련기사

 
저작권자 © 문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