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뉴스 MHN 김민경 기자] 예술의전당(사장 고학찬)이 6월 11일까지 2017년 서울서예박물관 현대작가특선 전시로 '정도준 - 필획과 구조 Stroke & Structure'를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우리 문화의 토대인 한글․한자 서예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글로컬 서예전도사 소헌 정도준(紹軒 鄭道準, 1948~)의 대표작부터 최근작까지 망라하고 있다. 이미지와 텍스트, 그리고 이들이 어우러진 70여 점의 작품을 소개한다. '태초로부터 From Origin', '천지인 Heaven, Earth, Man' 시리즈와 기존의 한글․한자 각체혼융과 병존, 전각 등 20여 년에 걸쳐 유럽등지의 해외초대전에서 선보인 걸작을 '동굴', '집', '붓길' 등 4개의 주제로 나누어 공개한다.

추상미술과 전통서예를 일맥(一脈)으로 관통하는 정도준 작품의 필획(Stroke)과 구조(Structure)의 근원적인 천착을 통해 우리 시대 서예의 새로운 진로를 함께 모색하는 것이 이번 전시의 목적이다.

▲ 정도준, 虹 ⓒ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은 인공지능과 로봇, 가상현실과 디지털 문자영상이 일상화된 기계시대 한가운데다. 키보드 '치기'가 일상문자생활에서 붓글씨 '쓰기'를 대체하면서 인간이 기계가 되어가고 있다는 경고 또한 이보다 더 크게 들린 때도 없었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전시에서 처음 선보이는 정도준의 '태초로부터' 시리즈와 같은 작품은 특히 문자문명의 패러다임 자체가 바뀐 이러한 시대와 사회 환경에서 '몸'에 의한 인간의 글씨쓰기인 서예가 어떻게 기계문자와 공존할 수 있는가를 근원적으로 묻고 있다. 더 나아가 인간에 의한 21세기형 새로운 서(書)를 정도준이 문제 삼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서書는 이런 것이다'고 정의定義의 이름으로 가두어 놓았다. 하지만 실존과 담을 쌓고 교통을 막아놓고 서(書)를 서(書)라 할 때 이미 서(書)가 아닌 것이다. 서를 서라 하면 이미 죽은 것이다.  '도를 도라 하면 영원한 도가 아니요(道可道非常道), 이름을 이름하면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名可名非常名)고 2,500여 년 전에 갈파한 사람은 노자다. 이와 같이 서(書)는 어떤 고정된 실체가 아님을 정도준은 필획으로 증거하고 있다.

▲ 정도준, 사랑 ⓒ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

서(書)의 역사가 증명하듯 태초에 말씀이 있었던 이래 서(書)는 시대와 사회, 필사도구의 발명에 따라 무수히 변하여 지금까지 왔다. 서(書)는 자연에서 비롯되었다(書肇於自然)고 했듯이 우주자연의 변화를 화면에 형상화 해낸 것이 서(書)다. 그래서 정도준의 서(書)는 신기(神氣)와 골육(骨肉), 혈(血)이 부여된 몸이자 정신이고, 우주 삼라만상이다. 

우리는 이제 동서구분이 무색한 문자영상시대 한가운데를 살고 있다. 인공지능이 주도하고 있는 지금이야 말로 바로 시공을 초월해서 살고 있는 새로운 신화시대(神話時代)다. 그래서 '태초로부터'는 특히 정도준이 기계언어가 아니라 '몸'이라는 언어로, 그것도 문자근원으로 돌아가 주유하면서 문자영상시대 신화를 새롭게 필획(筆劃)하고 재구축해낸 것이라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가 있다. 

▲ 전시 전경 ⓒ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

이번 전시는 총 4개의 테마로 구성된다. 전적으로 이미지에 호소하는 '동굴 - 태초로부터' 섹션과 이미지와 텍스트가 함께 노래하는 '집Ⅰ - 문자의 우주宇宙'와 '집Ⅱ - 따로 또 같이 살기' 그리고 글자의 정신성을 문제 삼는 '붓길, 역사의 길' 섹션으로 나뉜다.

첫 번째 섹션인 '동굴 - 태초로부터'에서는 서(書)와 미술의 경계를 허문 '태초로부터' 시리즈와 그 전조가 된 '천지인'시리즈 등을 만나볼 수 있다. '태초로부터'는 정도준의 서예궤적에서 동과 서가 하나 되는 결정판이다. 그 이유는 서(書)를 중심으로 현대미술을 녹여냈기 때문이다. '태초로부터'는 이우환이 있는가 하면 박서보, 정창섭도 있다. 르네 마그리트는 물론 피에르 슐라즈, 프란츠 클라인, 안토니 타피에스도 포착된다. 하지만 이들과 정도준이 다른 것은 서(書)언어의 유무다. 선이 아닌 필획, 즉 평면의 라인(line)이 아닌 입체의 스트록(stroke)에 근거한 구축적인 공간경영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난다. 정도준은 전통과 현대, 동과 서가 여하히 하나로 만날 것인가의 문제를 이렇게 '태초로부터'로 풀어낸 것이다. 

▲ 전시 전경 ⓒ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

두 번째 섹션인 '집Ⅰ - 문자의 우주宇宙'에서는 글자라는 틀 속에서 살아가기로 합의된 서(書)의 전통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작품들을 소개한다. 특히 서(書)의 형태나 이미지라는 입장에서는 한자漢字 한글의 전篆·예隸·해楷·행行·초草 내지는 고체古體와 궁체宮體가 즐비하다. 또 한글 한자의 병존竝存과 각체의 혼융混融이 자유자재로 필획되면서 공간이 구축되고 경영된다. 더 나아가서 전각은 물론 첫 번째 섹션에서 본 문자추상까지 그 스펙트럼은 무한대로 확장된다.

세 번째 섹션인 '집 Ⅱ - 따로 또 같이 살기'에서는'해야 고운해야 Sun, Dear My Suns','길 The Road'등 혼용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이 또한 다른 서예 작품과는 차별화된 정도준만의 색이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정도준의 공간경영, 즉 장법(章法)을 보면 한글 한자 언어(言語)의 병존(竝存)과 서체 (書體)의 혼융이 한 축을 이룬다. 심지어 서(書)와 전각(篆刻)의 병존은 물론 바위그림과 조각보가 한자 한글과 같은 문자와 나란히 자리하면서 유기적으로 어울린다. 더 나아가서는 한글서와 한자서와 같은 서로 다른 문자는 물론 전서(篆書), 예서(隸書)와 해서(楷書), 행초(行草) 각체가 병존된다. 급기야는 전예와 행초가 한 문장에 혼융(混融)되어 구사된다. 

▲ 전시 전경 ⓒ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

네 번째 섹션인 '붓길, 역사의 길'에서는 '숭례문 복구 상량문', '신에게는 아직 열 두척의 배가 남아있나이다' 등 역사적인 소재로 작업한 작품들이 등장한다. 서(書)의 절반이 내용, 즉 텍스트다. 이번 전시의 역사섹션의 현판이나 어록은 그 자체만으로도 정도준이 편집해 낸 붓길의 역사이자 우리 역사의 길이다. 특히 내용, 즉 텍스트가 글자이미지는 물론, 동시에 정신까지도 결정한다는 지점에 가서는 또 다른 '태초로부터' 노래가 들린다. "정도준이 시와 명구를 서예로 풀어낸 것을 읽노라면 그가 오랫동안 추구한 철학적 사고와 작업이 조화를 이루어 낸 것 같다. 그러나 예술에서 그러한 순간은 짧고 신비로운 자아감과 유사함으로 표현된다. 정도준은 이를 탁월한 자세로 풀어낸다"고 한 사람은 「정도준: 찰나의 기억」을 쓴 미국의 권위 있는 미술평론가 조나단 굿맨이다. 서(書)가 미술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내용과 조형이 한 몸이라는 점이다. 정도준의 '태초로부터'가 진정으로 힘을 받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텍스트와 이미지, 즉 내용과 조형이 역사적 맥락에서도 한 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노산 이은상의 '조국아'는 정도준 붓끝에서 반구대 암각화의 고래, 사슴, 호랑이, 멧돼지를 바로 지금 일 만 년의 시공을 뚫고 오늘 이 자리에 불러내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또 최치원, 이순신, 김시민, 정약용, 윤봉길, 안중근, 김구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소리를 무고(憮古)의 붓질로 증언해내는 정도준은 그 자체가 우리정신이고 역사다.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나이다'고 필획할 때는 정도준이 이순신 장군이다. 또 안중근이라 쓰고 영웅이라 읽을 때는 이미 정도준도 안중근이 되어 국가안위를 노심초사하고 있다. 

▲ 정도준,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있나이다 ⓒ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

한편, 예술의전당은 이번 전시와 관련해 작품과 학술의 관점에서 조명하는 부대행사도 개최한다. 전시기간 중 5월 19일 오후 2시에는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4층 컨퍼런스홀에서 정도준 작가와 이동국 예술의전당 수석큐레이터, 심은록 비평가가 함께 서(書)의 철학과 시대성을 전시작품과 학술로 조명하는 '작가와의 대화'가 열린다. 전시 입장권은 성인 3,000원, 학생 2,000원이며 예술의전당 홈페이지와 현장매표소에서 구입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서울서예박물관에서의 전시 종료 후 6월 29일부터 8월 27일까지 진주시립이성자미술관에서도 개최된다.

▲ 정도준 작가

정도준 작가는...경남 진주 출신인 소헌 정도준(紹軒 鄭道準, 1948~ )은 서예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국전초대작가와 심사위원 등을 역임한 유당 정현복(惟堂 鄭鉉福, 1909~1973)이다. 누구의 강요도 없이 자의로 서예를 배우기 시작한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여러 대회에서 입상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린 아들이 자신처럼 힘든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것을 걱정했으나 한편으로는 대를 이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소헌(紹軒)'이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이 일이 그저 취미로 할 일이 아님을 깨닫고 일중 김충현(一中 金忠顯, 1921~2006) 선생을 사사하여 자신만의 서예세계를 구축해 나갔고, 1982년 제1회 미술대전 대상을 수상하였다. 

1999년 독일 국립 슈투트가르트 미술대학(Stuttgart Kunst Academy)초대전을 계기로 소헌 정도준은 서구 화단에 정식으로 진출했다. 그 후 독일 키스트 유럽(KIST EUROPE) 초대전, 프랑스 유네스코(UNESCO Miro)초대전, 2003년 이탈리아 체탈도(CERTALDO)시립미술관 초대전, 벨기에 한국대사관 초대전, 2004년 독일 린덴박물관(Linden Museum)초대전, 2016년 프랑스 파리의 위트릴로 발라동 미술관(Musée Utrillo-Valadon) 개인전 등 유럽 각지에서 수차례의 전시를 열며 한국 서예를 세계에 알리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 전시 전경 ⓒ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

avin@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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