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뉴스 아티스트 에디터 강해인 starskylight@mhns.co.kr 영화를 보고, 읽고, 해독하며 글을 씁니다. 좋은 영화는 많은 독자를 가진 영화라 믿고, 오늘도 영화를 읽습니다.

[문화뉴스 MHN 아띠에터 강해인] 오르되브르는 정식 식사에 앞서 식욕을 돋우기 위한 음식입니다. [영읽남의 오르되브르]는 관람 전, 미리 영화에 대해 읽어보는 코너입니다.

'에이리언', '프로메테우스'에 이은 리들리 스콧의 우주 SF 영화 '에이리언: 커버넌트'는 집요하다. 리들리 스콧이 여태 보여준 이미지(에이리언이 몸을 관통하는)는 여전히 전시되고, 그가 물었던 질문(인간은 어디서 오는가)도 역시나 언급된다. 또 한 번, '창조'에 관해 묻는 '에이리언: 커버넌트'는 누군가의 피조물이라는 위치에서 싸우는 종족 간의 이야기로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종족은 창조주의 위치를 노리며, 자신의 업적을 전시하기도 한다.

 

 

실종된 프로메테우스호 이후 10년 뒤, 개척지를 향해 가는 커버넌트호는 인류의 한걸음이라 근사하게 포장된 일을 수행한다. 하지만, 결국 인간의 호기심 뒤엔 엄청난 '경쟁'이 있고, 그에 따르는 '대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에이리언: 커버넌트'에서 이미지로 만나게 될 그 대가는 참혹하고, 살벌하며, 관객의 숨통을 조여 오는 공포의 얼굴을 하고 있다. 우주 어딘가에 있을 미지의 생명체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처럼 유쾌하지만은 않다.

인류, 진보, 창조 등 철학적이고, 인류의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에이리언: 커버넌트'는 무거운 영화다. 더불어 영화의 스타일 역시 묵직하다. 우주, 우주선, 새로운 행성 등 매혹적인 미장센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지만, 카메라가 앞장서서 이를 드러내지는 않는다. '프로메테우스' 때 있었던 평처럼, 리들리 스콧은 고전 영화적인 느낌을 추구했다. 여기서 고전이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등의 우주 영화로 우주 및 우주선이라는 공간과 분위기, 그리고 본질적인 이야기만으로도 감흥을 주는 영화를 말한다.

 

 

'프로메테우스'가 개봉했을 당시, '박스오피스 매거진'엔 이런 글이 있었다. "(중략) 우리는 마이클 베이의 교조적인 로봇 트럭에 관한 바보 같은 판타지가 SF로 간주되는, 우둔하고 어리석은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니 '프로메테우스'가 천국으로부터 훔쳐낸 불꽃의 빛과 열기에 대한 지적이고 격조 있는 진짜 SF 장르의 시작이 되도록 허하자"(씨네21 참고) 이는 현대 SF 블록버스터의 미덕인 '파괴와 액션, 그리고 빠른 컷 등의 기교로 승부를 거는 것'에 대한 일침으로 볼 수 있다.

이런 현대 영화에 익숙한 관객일수록 '프로메테우스', '커버넌트', 그리고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등의 영화가 지루하고, 재미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리들리 스콧은 (영화에서도 클래식을 자주 언급했듯) 고전적인 방법으로 정면승부를 걸었다. 그는 에이리언이 숙주를 오염시켜 끝장냈듯, 현란한 스타일만 있는 영상이 영화를 변질시키고, 결국 망치고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걸까.

 

 

거장 리들리 스콧은 초창기 작품 '에이리언'과 '블레이드 러너'의 무대, 상상력의 보물창고인 우주로 돌아왔다. 그리고 '프로메테우스'에서는 창조주를 만나고 싶어 했다면, 커버넌트호에서는 인류와 인간에 관한 질문에 더 관심이 있다. 이번 영화에서 우리의 역사는 어떤 과정이었고, 인류의 진보를 향한 열망이 무엇으로 향하는지에 관해 지독히도 파고들었다.

'에이리언: 커버넌트'는 인간이기에 필연적으로 가지는 창조와 호기심에 관한 열망, 그 극한에 관한 리들리 스콧의 디스토피아를 볼 기회다. 영화의 아름다운 스펙터클이 무엇인지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꼭 큰 스크린에서 관람해야 하며, '커버넌트'의 관람 전에 '프로메테우스'를 선행 학습하고 가는 것도 권장한다.

 

▲ [양기자의 씨네픽업] '에이리언: 커버넌트'에 관한 10가지 잡지식 ⓒ 시네마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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