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권 작가의 '평화의 시대'. '스타워즈' 시리즈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을 한 자리에 모아 '평화의 시대'를 함께 즐기는 순간을 구현했다.

[문화뉴스 MHN 양미르 기자] '한 분야에 열중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일본어 '오타쿠'는 네티즌 사이에서 비슷한 발음인 '오덕후'로 변형됐고, 줄임말로 '덕후'가 됐다.

'덕후'가 '학위 없는 전문가', '능력자' 등으로 불리며, 긍정적인 인식이 포함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일본의 하위문화를 상징하는 '오타쿠'라는 단어로 출발했지만, 오늘날의 '덕후'는 분야와 경계를 막론하고 자신의 관심 분야에 시간과 경험을 즐거이 투자하며, 전문적 지식이나 실력을 축적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확장되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 북서울미술관에서 11일부터 7월 9일까지 열리는 '덕후 프로젝트: 몰입하다'는 '덕후'로 대변되는 동시대 사회문화적 현상을 살펴보고자 만들어졌다.

 

   
▲ 박미나 작가의 '2000-2009 핸드폰 액세서리'. 박미나 작가가 자신의 핸드폰 장식을 위해 10년 동안 수집했던 액세서리를 모았다.

이번 전시는 11명의 작가의 신작으로 구성된다. 창작의 모티브가 되거나 대중문화의 동향을 읽을 수 있는 수집(김성재, 박미나), 예술적 태도와 긴밀히 연결되는 취미 활동(김이박, 진기종), 영화나 만화의 한 장면이나 연출 방식 등 관심 있는 특정 장르나 소재나 어휘를 따온 작업(신창용, 이권, 이현진, 장지우), '덕후'에 반영된 고정 관념(조문기), SNS의 생산 소비 구조 속 유행의 유동적 속성에 대한 고찰(송민정) 등 참여 작가 고유의 언어로 펼쳐지는 다양한 영상, 회화, 설치 작업을 만날 수 있다.

11일 오후 서울 노원구에 있는 서울시립미술관 북서울미술관에서 전시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이번 기자간담회엔 기혜경 북서울미술관 운영부장, 김채하 큐레이터, 조문기, 장지우, 신창용 작가, 고성배 독립잡지 'The Kooh' 편집장이 참석했다.

 

   
▲ 김성재 작가의 '수집에서 창작으로'. 김성재 작가가 쉽한 다량의 피규어들은 그의 창작 과정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기혜경 운영부장은 "북서울미술관의 올해 전시 주제어는 주변, 경계"라며 "주변, 경계를 주제어로 설정한 이유는 장소와 장르의 경계, 사회적 관계의 주변인을 뜻한다. 이 의미는 또다시 타자나 잊혀진 것들에 대한 인식과 배려, 그것을 통해 가능하게 된 대안, 혁신성을 보여준다. 개인의 삶과 기억, 사회적 공동체가 관여하는 동시대 특성이 비슷해 그 주제어를 설정했다. 이렇게 설정된 주제를 통해 전시, 교육, 문화행사를 유기적으로 아우를 수 있도록 통합했다. 미술관이 시대를 보여주며, 사회적 공공재 역할을 하려고 하면서 '덕후 프로젝트'를 기획하게 됐다"고 입을 열었다.

이어 기혜경 운영부장은 "이번 전시는 '오타쿠'에서 '덕후', '메타덕후'까지 모두 아울러보자는 취지로 진행됐다"며 "한 분야를 깊이 파고들고, 좋아하는 것을 드러내는 젊은이들의 행동양식에 초점을 맞췄다. '오타쿠'하면 폐쇄적인 이미지가 있는데, 이런 이미지가 한국으로 넘어와 '덕후'로 변화하면서, 열정과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로 의미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공동체의 장으로 열리고, '덕후'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어떤 몰입이 갖는 동시대적 중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하면서 이뤄진 사회문화현상이 됐다"고 덧붙였다.

 

   
▲ (왼쪽부터) 고성배 'The Kooh' 편집장, 신창용, 장지우, 조문기, 김채하 큐레이터, 기혜경 운영부장이 기자간담회에 참석했다.

"개인에겐 충족, 사회엔 연대, 문화는 대안문화 성격이 있어서 이번 전시를 메인 전시로 기획하게 됐다"고 말한 기혜경 운영부장은 "이번 전시는 대중매체에서 '오타쿠'가 가지고 있는 수집에 초점이 있다. 젊은이들의 대안적 창조성에 초점을 두고,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덕후'라고 했을 때 가지고 온 이미지와 다른 측면을 발견할 것이라 본다. 여기에 학술 세미나에서도 같이 연계해서 풀어내려 한다. 미술사학자, 문화비평가를 모시고 전시 중 프로그램을 마련해 새로운 담론을 보여주는 미술관으로 거듭나려 한다"고 밝혔다.

김채하 큐레이터는 "한국에서 '오타쿠'가 '덕후'로 변화하면서, 클래식 음반, 밀리터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클덕, 밀덕으로 바뀌는 등 어떤 좋아하는 분야에 깊이 몰입하고, 소통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사회 현상에 주목하려 했다. 그 현상을 바탕으로 전시를 기획하게 됐다. 전시를 보면 캐릭터나 소품 수집을 통해 '덕후'가 가진 수집에 대한 행위뿐 아니라 일상, 식물을 키운다거나, 낚시를 즐긴다는 취미활동 작품도, 만화, 영화와 같은 일반 서브컬처 등 좋아하는 분야를 자신만의 관점으로 재창작으로 하는 맥락을 볼 수 있다"고 소개했다.

이어 김채하 큐레이터는 "'덕후'가 반영하는 사회 인식 구조를 가지고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그러한 작품을 펼치는 작가도 있다. 우리 사회가 가진 사회적 인식도 되돌아보고, 어떤 동시대성을 함유하고 있는지도 발견할 수 있다. 반드시 일본의 서브컬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확장하고 변화하고 있는 문화양상을 살펴보도록 기획했다"고 전했다.

   
▲ 장지우 작가의 '지우맨'

큐레이터의 소개에 이어, 전시에 참여한 이들이 작품을 소개했다. '초자연현상 매니아 류혹성' 작품을 만든 조문기 작가는 "인터넷 유머 중에 '애니메이션은 좋아하지만 덕후는 아니라능'이라는 말이 있다. 최대한 우회하면서 말하는 성향이 있다. 나는 '덕후'도 아닌데, 주변에서 이상한 짓을 많이 하고 있어서 '덕후'인 것처럼 의심하셔서, 전시까지 하게 됐다. 여러 분야를 좋아하다 보니 오해를 사고 있다. 그런 상황이 흥미로웠다"고 이야기했다.

조문기 작가는 "이전에 인간의 갈등과 맹신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며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는 사람들의 심리를 보고, 어떤 것을 몰입할까 생각해서 그것과 부합되는 것이 '오타쿠'라고 봤다. 기존에 이런 말이 없어서 그렇지, 어르신들이 한의학, 종교, 기에 의존하는 것을 종종 볼 때가 있었다. 기, 초자연 현상 등에 대해 찾다 보니 가상 인물을 연기하자고 생각해서, '류혹성'이라는 초자연 캐릭터를 만들고 다큐멘터리를 찍었다. 어떤 몰입해있는 사람을 만들고 영상 촬영을 했다"고 작품을 소개했다.

일본의 서브컬처 중 하나인 '특촬물(특수촬영물)'의 장르적 특성을 복각한 '지우맨'을 만든 장지우 작가는 "한국에 흔히 '특촬물'이라고 말하면, '파워레인져'나 '후레쉬맨' 등을 이야기한다"며 "'특촬물'에 관심을 가진지 꽤 됐고, 직간접적인 영향이 있어서 스스로 슈퍼 히어로를 만들어, '특촬물'의 클리셰를 재해석해 영상으로 만드는 작업을 지속해왔다. 어떤 에피소드 형태에서 시리즈를 만들고 있는데, 이번 전시엔 5편을 올렸다"고 말했다. '지우맨'은 영웅 성장 서사를 통해 자전적 경험을 이야기하며, 그것이 어떻게 청년세대의 현실을 드러내는지 전달한다.

 

   
▲ 신창용 작가의 '킬 빌' 작품.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영화 '킬 빌'과 코엔 형제 감독 영화 '파고'의 특정 장면을 자신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회화 작품을 선보인 신창용 작가는 "'덕후'가 그린 그림이라는 신조어로 '덕화'를 하고 있다"며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를 20년 동안 덕질해서, 그림을 그렸다. 뉴욕에서 코엔 형제와 타란티노 감독 작품을 붙여서 작가들이 대결을 펼친 전시가 있었다. 이번 전시에서도 그런 배치를 해봤다. 영리하지 못해서 '무식한 덕후'라고 말을 하는데, 계속 무언가를 보고 연구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어떻게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덕후'가 됐는지 묻자 신창용 작가는 "쿠엔틴 타란티노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며 "사회적 약자, 소외당한 피해자인 주인공이 복수를 해야하는 상황이 있다. 나 역시 사회적 약자라고 생각해서 공감을 받았고, 그중 '킬 빌'은 정말 처절하다. 감정이입이 굉장히 많이 됐다. '킬 빌'이 처음 나왔을 당시, 나도 그런 비슷한 상황에 부닥쳐져 있어서 가장 좋아한다"고 밝혔다.

독립잡지 'The Kooh' 편집장인 고성배는 "흔히 우리나라 사람이 일을 쓸모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나눈다. '덕질'은 쓸모없는 것에 속한다. 그런 것이 볼썽사나웠다. 누구나 좋아하는 것이 있다. 집에서 옷을 입거나, 맛집을 돌아다니는 것 모두 '덕후'들이다. 애니메이션을 보거나 '건담'을 모으는 사람만 '덕후'라고 해야할 필요가 있는가 하고 생각해 이 잡지를 만들기로 했다"고 이야기했다. 이번 전시는 잡지에 소개된 '덕후'의 습성 10가지를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참여형 전시로 진행된다. 누구나 자발적으로 몰입할 수 있는 자신만의 '덕질 분야'가 있음을 말하고자 한다.

 

   
▲ 'The Kooh'에 있는 '덕후 자가진단표'

한편, 김채하 큐레이터는 일반인이 아닌 작가들을 대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한 이유에 대해 "어느정도의 '덕후'인가에 초점이 맞춰지길 경계했다"며 "동시대 사회 문화에서 어떠한 양상을 보여줄 수 있을지, 미술가분들의 해석과 관점으로 작품을 표현하고자 했다. 일차적으로 미술가분들이 갖고 계신 '덕후 문화'에 기준을 잡으려 했다. 다양한 시도를 하고 계시는데, 어떻게 보면 작품 속에서 또 다른 전시와 같은 코너 활용을 할 것 같았다"고 이야기했다.

기혜경 운영부장도 "흔히 레벨을 경쟁하려는 심리가 있는데, '덕후'의 경중도를 가지고 미술관을 가면, '나는 쟤보다 더 레벨이 더 높은데'라고 생각할 수 있다"며 "그것과는 다르게, 미술관에서 할 수 있는 전시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전시가 사회문화적 현상을 읽어내고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궁금했다"고 덧붙였다. 이어 "자신이 어떤 '덕후 기질'을 가졌는지, 관람객에게 생각해볼 수 있는 전시며, 단순히 우리가 아는 '수집벽'이라는 아주 좁은 울타리에 가두지 않고 좀 더 넓은 의미에서 보는 전시라 할 수 있다"고 전했다.

mir@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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