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리디아가 만나는 대한민국 최고예술가 100'은 오랜 문화예술계 및 방송 경력으로 다져진 그가 문화뉴스의 부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만들어진 특별한 코너다. 대한민국의 예술계를 이끌어온 아티스트들의 노고를 기리고 그들의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자 기획됐다. 어디에서도 쉽게 듣지 못하는 탑아티스트들의 진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박리디아는?]

[문화가 있는 날·예술이 있는 삶을 빛냅니다…문화뉴스]
첫 연출 데뷔작부터 그는 예사롭지 않았다. 1983년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슬프게 하는가'로 이듬해 동아연극상에서 대상을 받았으며, 1985년 '무덤없는 주검'으로 역시 다음 해 동아연극상에서 작품상을 받았다.

그는 사실 독특한 이력을 보유하고 있다. 동명여고 교사로 재직 중 연극반을 창설하며 동랑 청소년 연극제에서 대상과 문교부 장관상을 받은 것을 계기로 교편을 접고 대학로 초기 연출가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이후 극단 광장과 반도를 거치며 다양한 작품을 만들었다.

1998년, 43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경기도립극단 예술감독을 맡았으며, 수원화성국제연극제 등 다양한 곳에서 활동하며 지난해부터 인천시립극단 예술감독으로 선임됐다. 환갑의 나이에도 연극에 무한한 열정을 쏟아붓고 있는 주요철 예술감독. 그의 연출 에피소드와 그가 앞으로 바라는 연극은 무엇인지 들어봤다.
 

   
 

문화뉴스가 선정한 '대한민국 최고 예술가 100인'에 선정됐다. 소감은?
ㄴ 앞서 선정된 분들을 보니까 쟁쟁한 대선배님이 계시는데 영광스럽다. 하나의 힘이 되게끔 북돋아 주는 걸로 알고 더욱 최고의 예술가가 되기 위해 정진하겠다.

최근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ㄴ 작년 인천시립극단 부임해서 정신없이 지냈다. 우리 극단 배우들이 수준이 높다. 그래서 배우들 데리고 좋은 작품 만들어, 세계를 향해 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요즘 그 작업에 매진 중이다.

그 작품이 어떤 작품인지 말해달라.
ㄴ 오늘(7일)이 공연 마지막 날인데, '메데아 네이쳐'가 있다. 홍창수 희곡 작가가 썼고, 에우리페디스의 원작을 새롭게 해석했다. 음악과 안무 역시 새롭게 들어가기 때문에, 보신 분들이라면 근래 보기 힘든 색다른 공연이라고 말할 것 같다.
 

   
▲ 연극 '메데아 네이쳐' ⓒ 인천시립극단

얼마 전 러시아 모스크바를 다녀온 거로 알고 있다. 20개 넘는 작품을 섭렵하고 왔다고 들었다.
ㄴ 지난해 10월, 모스크바를 러시아 최고 연출가 중 한 명인 발레리 벨리코비치의 초청으로 갔다. 그는 행위예술로 20년 전 한국에 와서 센세이션을 일으킨 연출가다. 모스크바에서 같이 할 수 있는 공동작업을 마련하려고 갔다. 결과적으론 올해 '로미오 & 줄리엣'을 우리 극단과 와서 같이 하기로 했다. 아무튼, 20여 일 정도 체류하면서 연극 20여 편만 보고 왔다.

러시아 연극이 세계 수준급인데, 그중 제일 잘 나가는 8명의 러시아 연극 연출가의 작품을 봤다. 러시아 연극의 수준이 이렇고, 꼼꼼히 보며 생각해보니 우리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우리가 1970~80년대 인문학과 깊이 있는 작품세계를 몰두했었고, 다시 서서히 철학과 인문학이 무대에 녹아내는 작품이 돌아오고 인정받는 세태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대로 자신 있게 만들어보자고 한 것이 이번 '메데아 네이쳐'였다. 아주 새로운 방법으로 만들었는데, 동양의 장자, 노자, '주역', 서양의 바슐라르를 좀 더 연구했다. 동서양의 어울리는 철학을 상당히 무대에 녹아내리려 했다. 메디아의 근성과 추구하는 인간이 잃어버린 본성을 찾아가는 자연을 추구하려 했다. 쉽진 않았지만, 세계무대에 도전하고 싶었다. 올해 환갑인데, 연출가로만 34~5년이 되었고, 대학로 1기 연출가로 새로운 방법을 도입해 다시 태어나는 기분으로 하고 있다.
 

   
 

에너지가 충만해 보이는데 비결이 있는지?
ㄴ 베이징에서 5년 있다가 왔다. 학교 사업도 하고, 중국 진출을 위해 재중국문화예술총연합회 회장도 맡았었다. 그래서 연출 작업을 오랫동안 못했다. 5년 동안 연극 연출을 못해 짓눌린 에너지가 이제 터진 것 같다. 또 외국에 오래 있다 보니 다시 한국을 되돌아보고 내 작업의 반성을 했다. "젊을 땐 좋은 작품도 많이 했는데, 나이가 점점 들면서 내 공부가 게을렀구나!" 이렇게 자만에 빠졌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래서 좀 더 세계를 돌아다니며, 공부하고, 단련하고, 작업을 해 나가면서 자신감도 들었다. 이런 상황에 활력도 생기고, 배짱이 두둑해졌다.

주요철 연출가의 연출 인생을 초창기, 중반기, 현재, 그리고 미래로 나눠본다면?
ㄴ 1983년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슬프게 하는가'로 아르코 소극장에서 데뷔했다. 그러면서 1984년 '제20회 동아연극상' 대상을 포함해 3개 부문을 휩쓸었다. 그 작품을 할 때 해석력, 작품의 깊이 때문에 엄청난 연구를 했다. 원작자 에드워드 올비의 작품 세계, 작품이 내재하는 그런 깊이를 찾아가는 연출을 원했다. 1985년 사르트르의 '무덤없는 주검'(1986년 '제22회 동아연극상' 작품상) 작품도 실존주의 세계를 다뤘다. 깊이 있고 문제를 해석해내는, 해석적 연출이 강했다.

1988년에 박범신의 유명한 소설인 '불의 나라'를 내재화해서 연출을 했는데, 히트를 했다. 새롭게 창조를 하려고 해도 끝이 없었다. 해석은 이미 텍스트를 깊이 들어가면 되는데, 만들어낸다는 준비과정에서 헤맸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니 실력이 달렸던 것 같다. (웃음) 이유를 생각해보니 30대 중후반을 중국에 가서 그랬던 것 같다. 미국이나 유럽에 가서 오래 체류했으면 달라졌을 것 같다. 그게 아쉽다. 다시 모스크바도 가보고, 올해 영국과 독일을 시간 있을 때 가면 더 많이 봐야 할 것 같다.

지금은 서양을 동양으로 끌어올려 동양의 우수성을 내세우고 싶다. 그래야 현대 작업이 좀 더 세련되질 것 같다. 내년에 준비하고 있는 것은 김좌진 장군과 한용운 시인의 이야기다. 두 사람이 같은 동네에 살았고, 독립운동을 했다. 물론 정신 운동을 한 한용운 선생과 만주 벌판에서 청산리 대첩을 이룬 행동파인 김좌진 장군의 스타일이 다른 점이 있다. 오은희 작가가 현재 집필 중이다. 이 작품은 한국 공연뿐 아니라 중국 진출을 염두에 두고 있다. 중국 사람들이 한국 연출가를 우습게 알고 있다. 유럽과 미국 연출은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일본도 괜찮다고 하는데 우리는 수준 낮다고 여긴다.
 

   
 

그래서 계획을 짰다. 영국의 유명한 연출가를 데려와 공동 연출을 해서 중국 시장에 진출하면 저들에게 상품 가치 있게 연극을 팔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공동작업을 올해는 발레리 벨리코비치와 '로미오 & 줄리엣'을 하고 내년엔 영국 연출가를 모셔올 예정이다.

그리고 내년 가을엔 한·중·일 연출가 공동작업으로 '리시스트라타'를 할 계획이다. 평화 이야기인데, 그리스 때 여성들이 성 파업을 일으킨다. 남자들의 전쟁을 반대하기 위해 여자들이 섹스를 거부해 결국 남자들이 두 손 들고 평화협정을 맺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약 2,500년 전 유명한 작품이다. 이것을 한·중·일의 전쟁에 맞춰서 김태수 작가가 아주 재밌게 쓰고 있다. 한국은 내가 연출하고, 중국, 일본 연출가가 와서 3국이 공동연출하는 것도 구상 중이다. 아시아권은 아시아 끼리 뭉쳐보고, 외국 연출은 와서 건져보려 한다. 우리나라에도 세계 연출가에 버금가는 연출가들이 많은데, 우리 시장이 작아서 빛을 못 본 경우가 많다. 이런 작업을 더 내 당당한 도전을 하는 모습이 성공하면 달라질 거로 생각한다.

글로벌한 우리 공연계가 보이는 것 같다. 지난해 인천시립극단 예술감독으로 뽑힌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ㄴ 인천시립극단엔 공채로 됐다. 인천시립극단을 왔을 때 이런 생각을 했다. 43살 때 경기도립극단 예술감독을 했다. 젊을 때 했다. 큰 단체를 맡고 나서 느낀 게 많았다. "내가 나름대로 한다고 해서 한 것 같은데 옹졸하게 이끌었구나"였다. 서울보다 비슷하게 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으니, 서울을 절대 못 이겼다. 그래서 인천은 세계로 간다고 생각했다. 세계로 가야만 서울과 같이 어깨를 마련하고, 인천의 지역색 역시 살아난다고 봤다. 그래서 부임하자마자 빨리 러시아 모스크바부터 갔고, 중국도 돌아보고 해서 빠른 교류를 하고자 했다. 인천시립극단이 내가 꿈꾸던 하나의 세계를 실현해주고, 토대가 되고 싶었다.

'메데아 네이쳐'를 했더니 전혀 '관냄새'가 안 난다고 했다. 관공기관에서 만든 느낌이 아니라, 서울의 괜찮은 극단에서 만든 느낌이라는 평을 받았다. 그만큼 신선하고 혁신을 꾀한 것 같다. 한편 우리 극단도 인천 시민들이 즐겁게 볼 수 있는 아주 쉽고 재밌는 연극, 뮤지컬을 만들려고 한다. 여기에 고급 마니아들도 느낄 수 있는 세계에 진출할 수 있는 작품도 만들고, 외국 연출이 1년에 한 번 들어와서 대중성 있으면서 색깔 있는 작품을 같이 만들려고 한다.

지난해 뮤지컬 '소금'같은 경우는 박범신의 아버지에 대한 찐한 소설인데, 외부 하나도 안 쓰고 대형 뮤지컬을 우리 자체배우로만 소화했다. 우리 극단이 재주 있는 배우들이 꽤 많다. 이런 자원을 잘 활용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는 것 같다.
 

   
 

부임하고 나서 대학로에서 인천시립극단의 관심이 많아졌다. 대한민국에서 주요철 연출의 연극계에서 가치부여를 스스로 내려본다면?
ㄴ 먼저 연극 외에는 취미도 없다. 술마시는 거 말고(웃음) 연극 만드는 것밖에 취미가 없다. 대학로가 막 생길 무렵 데뷔를 했다. 대학로 1기 연출가 세대라고 하는데, 대학로에서 길러진 뚝심과 강한 연극 정신은 되어있다고 생각한다. 누가 뭐래도 그 정신은 있는 것 같다. 배고픔 등 진정한 연극의 어려움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세계를 보며 '우물 안 개구리'가 되었다는 것을 고쳐나가려 한다.

스스로 극단을 25년 끌어오면서 어려움도 많았다. 집도 날리고, 집사람과 이혼 두 번 할 뻔했다. 첫 번째는 결혼하자마자 연극 '영원한 제국'을 쫄딱 망하는 바람에 위기가 왔었고, 두 번째는 약 10년 정도 지나고 '투란도트' 하면서 대극장에서 대폭 망한 때였다. 집사람이 연극제작만 하지 말라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어떻게 안 할 수 있을까? 인천 오며 내 돈 내고는 안 하니까 참 행복했다. (웃음) 경기도립극단 있을 땐 행복하기보단 "그냥 하는 거지"였는데, 여기 와선 "월급 주고 다 마련해주니 이것으로 안 만들면 내가 어떻게 하겠는가?" (웃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앞서 질문한 활기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웃음)

흥행의 성패와 상관없이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 세 가지를 뽑는다면?
ㄴ 그래도 제일 기억 남는 것은 데뷔작인 올비의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슬프게 하는가'다. 그때 출연배우가 최종원, 이혜나, 윤여성, 현금숙 이렇게 네 분이었다. 이 중 윤여성 씨를 제외한 모든 배우가 동아연극상 연기상을 받았다. 준비하면서 지하 연습장에서 최종원 배우가 특히 저를 괴롭혔다. 브라킹(동선)을 그으면 "감정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해서, 밤을 새우며 A, B, C 총 세 가지 브라킹을 그었었다. 내가 배우의 느낌에 져선 안된다는 생각에 세 브라킹을 준비했었다. 그런 정신이 컸던 작품이었다.

두 번째는 1988년에 했던 '매춘' 작품이 있다. 사전검열 거부를 해서 경찰도 떴고, 작품을 창작하며 작가를 3명이나 바꾼 적이 있다. 여배우를 한 번도 안 벗겼는데, 동명 영화에서 벗겼다고 연극에서 벗긴 것처럼 착각했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한 창작 중에서 가장 잘 만든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세 번째는 1984년 '보석상'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한을 기념하기 위해 연출한 종교극이었다. 교황이 젊은 시절 직접 쓴 작품이다. 희극 자체는 연극적인 텍스트가 아니라 독백을 주고받는 작품인데, 반응이 좋았다. 그리고 명동성당에서 교황님의 은총도 받고 세례까지 받았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기억 남는 작품이 다 80년대에 있다. 90년대부터 만드는 작품의 힘이 약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제 환갑 넘어서 기억나는 세 편을 만들어야겠다. (웃음)
 

   
 

가장 힘이 약했다는 90년대와 2000년대 작품을 꽤 했었다.
ㄴ 그 때 가장 기억나는 작품이 '절대신호'였다. 가오싱젠의 작품으로, 중국 최고 연출가인 린자오화가 연출했다. 린자오화가 연출가 데뷔할 무렵인 80년대 초반에 연출한 작품이다. 그때 만든 '절대신호'보다 저 당시 주요철이 만든 것이 더 잘 만들었다는 평을 받았다. 가오싱젠이 요구한 소리와 이미지 등 갖가지 음성부호를 제대로 살렸다. 앞서 언급했던 힘이 약한 시기 중 이 작품이 제일 좋았던 것 같다. (웃음)

배우로 만날 때 주요철 연출의 느낌은 뭐가 어찌 됐던 간에 꼭 이뤄낸다는 것이다. 그런 뚝심이 있었던 것 같다. 배우들과 작업할 때, 연출가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ㄴ 배우를 매우 편하게 해줬다. 될 수 있으면 배우가 연기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준다. 물론 시간이 정말 안 남았을 때나, 진짜 연기가 올라오지 않으면 쳐들어가긴 한다(웃음). 간섭하지 않고 배우들에게 그림을 그려주는 것 같다. 딱히 연출 수첩도 없고, 지시를 머리로 한다. 적지 않고 생각을 해서 그런지 자연스럽게 연출 선이 그어지는 것 같다. 믿고 기다려지면 연기가 나오는 것 같다.

공연계 연출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ㄴ 우선 준비를 좀 많이 했으면 좋겠다. 책도 많이 읽고, 해석력이 뛰어나야 한다고 본다. 많은 원로분이 겉만 보고 깊이가 없다는 우려를 하신다. 보는 눈만 기르지 말고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중요하다. 보고 느끼며 응용하기는 쉽겠지만, 진정한 생각에서 나오는 연출력은 만만치 않다. 선진국들도 마찬가지지만, 배고프고 힘들 때 끝까지 버텨나가면 길이 보인다. 사람이 죽으라는 법이 없으니, 그 길로 당당하게 나가면 승리자가 된다고 본다.

앞으로의 연출가이자 예술감독인 주요철의 각오를 듣고 싶다.
ㄴ 어떻게 보면 나이가 중견에서 원로로 가는 그 사이에 온 것 같다. (웃음) 좀 더 연극계를 위해서 좋은 일을 더 해야 한다. 후배들을 끌어주고, 한국, 중국, 일본을 잘 연결해 유럽처럼 편하게 교류하고, 작업하며, 친구가 되는 이런 걸 좀 더 빨리 심어줘야겠다. 세계무대에 도전해서 공식 초청을 개런티받고 하는 것이 죽기 전까지의 도전 과제다. 상을 받을 욕심이 아니라, 우리나라가 아직 이루지 못한 것을 하고 싶다.
 

   
 

[글] 문화뉴스 박리디아 (Lydia Park)_본지 부사장 golydia@mhns.co.kr
[정리·사진] 문화뉴스 양미르 기자 mir@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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