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뉴스] 2017년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 촬영상 후보에 오른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 '사일런스'가 지난달 28일 개봉했다.

 
영화 '사일런스'는 17세기 일본을 배경으로 한다. 실종된 신부 '페레이라'(리암 니슨)를 찾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한창인 일본으로 목숨을 걸고 떠난 2명의 선교사 '로드리게스'(앤드류 가필드), '가루프'(아담 드라이버)의 이야기를 담았다. 여기 159분의 대서사시에서 '15초' 동안 만날 수 있는 배우가 있다. 바로, 연극의 메카 대학로에서 활동 중인 배우 남정우다.
 
남정우는 신학대 연극동아리 시절 무대에 오른 '침묵'을 잊지 못해 배우의 길을 걷게 됐다. '사일런스'에 출연하기 위해, 2013년 무작정 뉴욕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사무실을 찾아갔지만, 만남에 실패하고 만다. 이어 2015년 '사일런스'의 촬영이 시작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대만 로케이션 현장을 찾았고, 수일간 촬영장 앞에서 기다리다가 현지 스태프의 도움으로 오디션 기회를 얻게 됐다.
 
비록 '마을 사람'으로 출연하기 때문에, 그의 출연 분량은 길지 않았다. 그러나 출연 장면만큼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출연 기회를 얻기 위해, 그야말로 '무한도전'을 펼친 배우 남정우를 대학로에 있는 본지 사무실에서 만났다. 먼저, 영화 '사일런스'의 작품 소개를 인사말 영상으로 살펴본다.
 

 
먼저 배우를 하고 싶었던 계기를 들려 달라.
ㄴ 제천 고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배우를 꿈꾸고 있었다. 당시 학생주임 선생님과 친하게 지냈는데, 특별히 꿈이 없던 상태에서 성격상 일이 있으면 주도를 했다. 그러다 선생님이 "너는 앞에서 주도를 잘하니까, 연극영화과에 가면 어떻겠냐"고 했다.
 
그러던 중 혼자 밤에 극장에서 영화 '아마겟돈'을 봤다. 그해 최악의 영화 중에 하나로 꼽혔다. (편집자 주 : 제19회 골든 라즈베리 시상식 7개 부문 후보에 올라 브루스 윌리스가 최악의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지금 와서 보니 이해가 되는데 전형적인 '미국영웅주의' 영화였다. 그런데 그 영화를 본 후, 나도 배우가 되면 저런 영웅을 연기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배우의 꿈을 꾸게 됐다.
 
그런데 '연극영화과'는 가지 않았고, 감리교신학대에 진학하게 됐다.
ㄴ 2년 동안 열군데 정도의 대학교에서 떨어졌다. 그렇다고 성적이 완전히 나쁘진 않았다. 수능으로 치면 400점 만점에 370점 정도 나왔다. 중앙대, 한양대, 서울예대 다 떨어져서 재수하게 됐다. 노량진에서 재수하는데, 연극영화과를 도전하기엔 자신이 없어졌다. 경쟁률이 몇백대 1이어서, 서울에 대학교에 가서 연극동아리를 가는 방향을 택했다. 그러면 길이 열리지 않겠나 싶었다. 감리교신학대에 합격했는데, 3수를 하고 싶지 않았다. 학교도 서대문역에 있어서 지리적인 입지도 좋아서 가게 됐다.
 
사실 신학대가 성경을 읽고, 찬송가만 부르는 건가 해서 가기 싫었는데, 자유주의 신학을 배워서인지 대부분이 인문학과 철학이었다. 그래서 공부를 많이 했고, 책도 많이 읽고, 연극 동아리에 들어갔다. 그렇게 대학동아리에서 올린 작품이 '침묵'이었다. '침묵'이란 작품을 만나서 너무나 감사했다. 92학번 출신의 연출 형님이 지금은 목사가 되셨는데, "형님이 아니더라도 제가 배우는 됐을 텐데, 이 영화엔 출연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사일런스' 대만 촬영 당시 말한 적이 있다.
 
   
 
 
대학생에서 1학년 1학기를 보내고 첫 여름방학 때, 배우가 되려면 이 여름방학 때 뭐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영화조명팀 막내를 찾는다는 내용을 인터넷을 통해 보게 됐다. '패왕별희'를 만든 천카이거 감독 작품이라고 했다. 중국을 가려고 여권을 만들어 놓은 상황이었는데, 그 연출 형님이 "배우가 되겠다는 놈이 영화 현장에 가서 반사판을 들고 있는 게 더 도움이 될지, 학교 무대에서 한 번 더 서보는 게 도움이 될 지 잘 생각해보라"고 했다. 결국, 나는 무대를 택했다. 후회하지 않았고, 그것 때문에 인생이 변하게 됐다.
 
결국, 2006년 극단 학전 소속으로, 연극 '지하철 1호선'에 데뷔했다. 당시 이야기를 들려 달라.
ㄴ 2004년 군대에서 제대하면서 계속 오디션만 봤다. 처음 봤던 오디션이 뮤지컬 '헤드윅' 초연이었다. 그때 오디션을 본 이유는 춤이 없었기 때문이다. 노래만 하면 된다고 했고, 당시는 춤도 배워보지 않았다. 친척 누나 집에 얹혀살았던 때인데, 친척 누나의 핫팬츠와 나시티를 입고 공개오디션에 참여했다. 당연히 서류탈락이 될 줄 알고 지원했는데, 오디션을 시켜주길래 나온 것이었다. 이후, 복학 신청을 하려고 할 때, 큰 신문사에서 연락이 왔다. "오전에 오디션을 본 분 중에 점수가 가장 높다고 해서, 연락하게 됐다"는 것이었다. 내심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기대하게 됐다.
 
그런데 결국, 조승우 형님을 비롯한 스타 배우들이 출연하게 됐다. 자연스럽게 대학로의 생리를 알아가게 됐다. (웃음) 밑도 끝도 없었다. 연극영화과 전공이 아니므로, 서류통과를 하기도 쉽지 않았다. 출연작품도 없었기 때문에, 경력란에 쓸 내용이 없었다. 그래서 1993년 배드민턴 충북대표, 1997~98년 제천고등학교 더블MC, 단양 마늘아가씨 선발대회 노래자랑 인기상 등을 썼었다. 좌충우돌로 계속 그렇게 부딪쳤다.
 
어떨 때는 1차 서류에서 떨어졌지만, 가끔 2~3차에 붙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아주 몹쓸 놈은 아니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오디션을 보면 지정곡이나 지정안무가 주어지는데, 그런 걸 준비하면서 조금씩 요령이 쌓였다. 사실 나 같은 경우는 '뮤지컬 넘버'가 있는 줄도 몰랐다. 오디션을 보면서 경험이 쌓였고, 넘버들이 많이 훈련됐다. 춤 학원도 많이 다녀서, 발레, 아크로바틱도 모두 하게 됐다.
 
   
▲ 2015년 '형제의 밤' 연극에 출연한 남정우 배우. ⓒ 문화뉴스 DB
 
10년 정도 넘게 대학로에서 활동 중이다. 소감을 들려 달라.
ㄴ 처음 데뷔했을 때는 내가 성공할 줄 알았다(웃음). 그땐 어렸기 때문에, 대학로에서 유명한 작품을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스스로가 대견했다. 전문지식이 없는 친구들이 "와, 잘한다. 정우야, 잘했어"라고 한 칭찬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이게 내가 잘해서 된 줄 알았다. 몇 년 안에 큰 성공을 거둘 줄 알았다. 그런데 연극 '지하철 1호선'이 끝나고 복학하자마자 막막해졌다. 나랑 같이 연기를 했던 사람들은 계속 작품 활동 중인데 나만 학교에 있으니까 답답하기도 했다. 2008년에 졸업하면서 더 큰 막연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대리운전이라도 시작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운 좋게 '명성황후'라는 작품에 오디션에 붙어서 다시 연기하게 됐다. 그 덕에 희망과 자신감을 얻었던 것 같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출연했던 작품들이 점차 늘어났다. 작품마다 항상 힘들게 공연을 올리면서 나 자신을 깨달아갔다. 내가 뛰어난 배우는 아니었다는 점을 느꼈음에도 나는 연극을 놓지 않았다. 그런데도 더 잘하고 싶었고,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다 2015년 '사일런스'의 촬영 이후, 연극 '형제의 밤'을 만나게 됐다. 처음으로 '나는 연기하면 안 되나'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한 시간 반 동안 2명이 무대를 채우는 건 정말 힘들었고, 내 부족한 면은 전부 다 까발려졌다. 정말 힘들게 마지막 공연까지 끌고 가야 했다. 작년에 이런저런 작품들을 했던 게 그나마 많은 도움이 됐다. 내가 영화를 찍거나, 공연을 연습할 때도 다 OK 사인이 나왔다. 돌이켜보니, 당시의 괴로움은 내게 도움을 주는 것 같다. (웃음)
 
배우분들이 많이 공감할 텐데, 혼자 있을 땐 뭔들 잘할 수 있다. 그런데 연기라는 게, 카메라 혹은 관객 앞에서 보여주는 것이다. 배우 자신이 생각한 것과 다르게 표현되는데, 나이 들고 경험이 쌓이니 떨리거나 쪼이는 게 줄어들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있어진 것 같다. 문제는 이때 실력을 쌓지 않고, 자리를 잡지 못하면 "저 선배는 나이를 처먹고 왜 저래"가 될 것 같다는 점이다. 실력을 더 쌓고, 욕을 먹지 않으려는 방향으로 열심히 잘해야 할 것 같다.
 
   
 
 
이제 영화 '사일런스' 이야기를 꺼내보자. 이 작품에 꼭 출연 하고 싶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
ㄴ 20여 년 동안 나는 목사님들이 해주는 말씀을 잘 듣는 착한 교인으로 살아왔었다. 그러다 학교에서 '침묵'이라는 일본 소설을 알게 됐다. '침묵' 소설이 굉장히 철학적인 작품이었다. 일본으로 선교를 떠난 신부님들이 자기로 인해 마을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다. "네가 배교(종교 배반)를 해야, 저 마을 사람들을 풀어줄 거다"라는 상황에서 신부님은 자기가 그동안 평생을 두고 믿어온 것을 버려야만 이 사람들을 살릴 수 있다. 예수님이 사람을 살리라고 하는데, 내가 그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으면 사람이 죽는 상황이다.
 
순교와 배교 사이에서 죽음이라는 문제에 직면한 사제의 모습을 두고, 선배님이나 교수님은 그 책을 읽고 너라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을 했다. 그래서 교회에서 주지 않았던 의심인 무엇이 답이고, 신앙이며, 옳은 것이냐는 고민을 처음 했다. 20살 당시에 연기를 얼마나 잘했겠냐만…. 나흘 동안 공연하고, 커튼콜 때 무대를 등지고, 나무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걸어거느냐는 액션을 취할 때, 내 가슴이 엄청 뭉클하고 뜨거워졌다. 지금 말한 당시의 감정이 되게 흐려진 상황이다. 흔히 배우분들이 공연할 때, 그 감정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 무대에 오른다는 말을 하는데, 그 감정이었다.
 
그것을 느끼기 위해, 배우가 되려고 결심한 난데, 내가 한 번 끝까지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건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들게 해준 작품이었다. 그 후로 10년 동안 배우생활을 하지만, 그런 순간은 없었다. '침묵'을 통해 자신 있게 나를 바꿨다고 말할 수 있었고, 몇 년 동안 영화 '사일런스'를 쫓아다녔다.
 
   
 
 
캐스팅 과정이 파란만장하다고 들었다. 자세하게 소개해 달라.
ㄴ 2012년 9월, "마틴 스콜세지 감독 일본 소설 '침묵' 영화 제작 예정"이라는 우리말 기사를 보면서 "오케이"를 했다. 배경이 17세기 일본이고, 일본 사람과 한국 사람의 차이를 서양 사람들이 잘 모를 테니 꼭 하고 싶었다. 처음엔 마틴 스콜세지의 팬 페이지를 통해서 메일을 보냈다. 이런 사연이 있고, 이런 작품에 꼭 출연하고 싶었다. '시체여도 상관이 없으니, 오디션 기회를 한 번만 주십시오'라는 내용이었다. 물론 속마음은 쿠보즈카 요스케가 맡은 '기치지로' 역할이었다. 그 역할을 내심하고 싶었다. 일본어도 전혀 못하는 상황이지만, 대사를 연습할 자신이 있었다.
 
오디션 보기 전엔 허황한 생각이 많았다. '올드보이'의 강혜정이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류승범처럼 좋은 작품 하나로, 좋은 배우의 반열에 들어갈 수 있겠다는 상상을 했다. 페이스북에서도 '상상은 돈이 안 든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메일을 보냈는데, 답장이 없어서 끝이 났나 싶었다. 나 역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촬영이 딜레이됐다. 2013년 '형제는 용감했다'의 도쿄 공연을 갈 때, '침묵' 책을 가져갔다. 내가 사랑하는 책을 일본 본토에서 보면 어떠냐고 생각했다. 이것 때문에 배우가 됐다고 일본 스태프에게 말하니, 선물로 일본 원서를 받게 됐다. 그 시기에 구글링하니, 다시 한번 촬영 예정 기사가 떴다. 그때 벌었던 돈으로 바로 뉴욕행 비행기를 탔다. 당시의 '기치지로'가 17세기 규슈 지방 사투리를 사용했다. 일반인들도 읽기 어려운데, 경상도와 전라도의 17세기 말을 생각하며, 그 어투를 녹음 받은 것을 한글로 다 적은 후에 외워서 준비했다.
 
뉴욕에 도착해 스콜세지 프로덕션 사무실의 위치가 홈페이지에 있어서, 맨해튼 110번지로 가게 됐다. 준비한 모든 자료와 프로필을 다 인쇄해서 가져갔다. 경호원이 누구냐고 먼저 막았다. 당당하게 나는 한국에서 온 배우고, 스콜세지 감독을 만나러 왔다고 했다. 약속했냐는 물음에 나는 '아, 그렇지'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안 했다고 하니, 여기는 프로덕션 사무실이어서 그 사람이 오지도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이 내용만 전해주면 된다고 해고, 경호원은 차라리 우편이나 메일을 보내라고 했다. 나는 언젠가 여기에 다시 찾아가겠다고 말하며, 돌아갔다.
 
   
 
 
미국에서 한 달 동안,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준비한 자료를 보내고 한국으로 넘어왔다. '침묵' 연극을 같이한 동기가 브루클린의 허름한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그 친구 집에 얹혀살았다. 그래도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순 없었다. 나도 배우로 일해야 했고, 불법체류자가 될 수 없었다.
 
그러다 '사일런스' 촬영이 또 연기가 됐다. 2014년 겨울, 정보소극장에서 '개똥벌레'를 하고 있는데, 기사를 또 봤다. '사일런스'가 대만에서 촬영 투자가 확정됐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내가 갔다가, 또 촬영이 연기되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번엔 꼭 촬영할 것만 같았다. 용기가 있다고, 대단하다고 하는데, 나도 무서웠다. 아는 사람이 정말 한 명도 없었다. 짧은 영어만 했다. 
 
인스타그램에 '#대만'이라고 해서 현지 한국 교포가 있나, 교회 사람이 있나 했는데 다 없었다. 아무튼, 대만에 도착한 후, 타이베이 영화진흥위원회를 찾아갔다. 기록을 남기려고 렌탈샵에서 캠코더를 빌려 갔다. 내 이야기를 솔직하게 하면 누가 봐도 또라이였고, 오타쿠였고, 마틴 스콜세지 팬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생각해낸 게 방송국 PD라고 말한 후, '스콜세지를 찾아라'는 TV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려고 들어갔는데, 30초 만에 쫓겨났다.
 
막막했다. 그거 하나만 보고 갔는데, 울뻔했다. 울 수 없었다. 숙소에 돌아가서, 할 수 있는 게 검색밖에 없었다. 계속 똑같은 뉴스만 있었는데, 영화진흥위원회를 찾아간 순간에 세트장에서 사고가 났다. 세트장에 붕괴사고가 나서 1명이 죽고, 2명이 심한 상처를 입은 것이다. 마지막 기사 말미에 장소가 나왔는데, 숙소 근처였다. 정말로 기자들이 엄청 모여있었다. 사람이 죽은 상태에서, 나만 좋자고 팻말을 들 순 없어서 며칠 동안 지켜봤다. 취재진이 빠지고 나서 팻말을 들기 시작했다.
 
   
▲ 남정우 배우가 당시 만들었던 팻말. ⓒ 남정우
 
10일에서 15일 정도 있었는데, 처음엔 팻말을 영어로만 써놨다. 할리우드 영화니까, 미국 스태프만 있는 줄 알았다. 쭈구리처럼 앉아있는데, 차가 지나갈 때면 서서 팻말을 보여줬다. 원래는 당당하게 '스콜세지 감독, 날 봐라'라고 하려 했지만, 너무나 무서웠다. 미국 관계자들도 이야기하지 않고, 나는 일을 하러 온 스태프라고 했다. 2일 동안 그러고 있는 나 자신이 쭈구리였다. 그래서 3일째엔 건너편으로 건너가서 계속 섰다. 아침 일찍부터 모두가 퇴근할 때까지 계속 서 있었다. 대만 스태프들이 관심 있어졌다. 그분들은 묻는 말에 답해주셨다. 촬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해서, 계속 있었다.
 
이번엔 중국어로 바꾼 후에 계속 들고 갔다. 근처 패미리마트 사장님과 경호원이 모두 "짜요" 해주셨다. 이 과정을 페이스북에도 올렸는데, 이걸 올리지 않았다면 열심히 하지 않았을 것이다. 금연하는 사람, 다이어트 하는 사람 모두 공표를 먼저 하라고 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나 보다. 내가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면, 관광만 했을 것이다. 중간에 차라리 영화가 엎어져 버리면, '남정우 저렇게도 했는데, 영화가 제작됐다면 뭐라도 했을 텐데, 용감한 도전자가 될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도 했다. 
 
정신을 차리고, 똑바로 하자는 생각을 할 때, 특수효과를 담당한 스태프가 와서 "이걸 봐라. 페이스북 페이지인데, 보조출연자 섭외회사다. 찾아가 봐라"라고 했다. 그래서 일본에서 연습했던 규슈 지방 사투리 연기를 드디어 했다. 연락이 왔고, 촬영을 같이했다.
 
드디어 꿈에 그리는 촬영을 했는데, 당시 에피소드를 듣고 싶다.
ㄴ 먼저, 도열하는 장면이 첫 촬영이었다. 새벽 3~4시까지 집합장소에 집합하라고 했다. 나는 하루에 만 원을 내는, 8인실을 썼다. 관광객들이 너무나 시끄러워서,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나왔다. 비가 엄청 왔다. 산꼭대기 같은 곳인데, 바닥도 엄청 진흙탕이었다. 17세기라서 짚신을 신으니, 발가락 사이가 다 까지고, 피도 났다. 세팅하니 추워지는데, 스콜세지 감독은 보이지도 않았다. "내가 시체라도 하고 싶었다"고 말하며, 보조출연자들을 보니 동네 아저씨, 아주머니도 계셨다. 내가 한국 배우인데, 이걸 하려고 이 고생을 했느냐는 생각도 들었다.
 
   
▲ 남정우 배우(왼쪽)는 결국 '사일런스' 촬영장에 입성했다. ⓒ 남정우
 
몇 시간이 지나니 스콜세지 감독이 페도라 모자를 쓰면서 나타났다. 그때 모든 피로와 괴로움이 다 가셨다. 어떻게든 눈에 들어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대만 사람들이 나를 좋아했다. 가져온 자료를 다 감독님께 전달해주겠다고 했기 때문에, 이미 감독님이 나를 알고 있는 줄 알았다. 눈에 들여오려고 카메라는 저기 있는데, 연기에 집중하고 그랬다. 촬영이 끝났는데, 감독님이 일일이 수고했다는 인사를 했다. 흑인 보디가드가 있었는데, 용기를 냈다. 나는 한국배우인데, 당신을 만나려고 뉴욕 맨해튼 110번지에 갔다고 했다. 
 
그러자 감독님은 제 눈을 바라보신 후 '수고했다, 알고 있었다'로 할 줄 알았는데, 어깨를 딱 치면서 "씨유 투모로우"하고 가셨다. 숙소에 돌아오니, 밤 9시~10시가 됐다. 완전 녹초가 됐다. 그러던 중 미리 진행한 '스포츠동아' 단독 인터뷰가 나왔다. 감성적으로 써주셨는데, 이름을 알릴만한 작품도 없었다. 마침내 목표를 이뤄냈고, 2006년부터 이것 때문에 달려온 생각만 나면서 눈물이 났다. 다시 파이팅을 하자는 생각에, 10회차 촬영 쉬는 날 스콜세지 감독에게 이 이야기를 알리고 싶어서 편지를 다시 썼다. '이렇게 해서 촬영했고, 너무나 감사하고, 더 좋은 작품에서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항상 품에 지니고 있었는데, 전해주기가 곤란했다. 촬영 작업을 하려고 나온 장소여서, 드릴 수가 없었다. 보디가드에게 편지를 드려도 되냐고 물으니, 그러한 내용에 서명했으니 하지 말라고 했다. 그것 때문에 더 쫄았다. 지금이 아니면 이 감독을 평생 못 볼 것 같아서, 점심시간 보디가드 분이 화장실을 간 사이에 "디스 이즈 포 유"라고 하면서 편지를 건네줬다.
 
나는 "잇 이즈 베리 인터레스팅"이라고 했고, 스콜세지 감독은 "땡큐"라고 답했다. 그날 촬영을 하고 나오는데, 감독님 재킷 주머니에 편지 꽂혀있었다. 사람이라면 읽어보지 않을까 했다. 감독님이 굉장히 유쾌하고, 웃으셨다. 힘을 먼저 불어넣어 주시고, "판타스틱", "렛츠 트라이 어게인"이라며 독려도 해주시고, 긍정적인 마인드로 항상 현장을 이끄셨다.
 
   
▲ 남정우 배우가 마틴 스콜세지 감독에게 보낸 편지 봉투. ⓒ 남정우
 
앤드류 가필드, 아담 드라이버, 리암 니슨 등 명배우들이 출연한 작품이다. 옆에서 지켜보면서 어떤 느낌을 받았나?
ㄴ 리암 니슨은 촬영 후반부에 등장해서 만나지 못했다. 솔직히 이들의 이름을 알고 있었지만, 작품을 본 적이 없었다. 앤드류 가필드는 아이돌인 줄 알았다. (웃음) '스파이더맨'에 나왔기 때문이었다. 대학로 배우들은 괜히 그런 게 있다. 연예인이 많이 출연하는데, 저기 연예인 누구야 하면 "너도 배우야"라고 말을 한 적이 있다. 오히려 일본 배우들은 역시 저 배우들을 잘 모르니 "센빠이, 센빠이"하고 친하게 지냈다. 쿠보즈카 요스케 역시 일본 아이돌 출신이어서, 캐릭터 이야기도 했다. '고'에서 제일교포 역할을 하기도 했었다.
 
어느 날, 병풍 역할을 하다가 세트장에 들어가라고 한 적이 있다. 배우들이 옆에 있고, 레디액션을 하니 싸우기 시작했다. 바로 그 장면인가 싶었다. 관리들이 "너희들 '기리시탄'이지"라고 묻고, "너희들이 아니라고 해도 소용이 없으니, 3명을 넘겨라"고 말한다. 신부들도 있는 상황에서 '기치지로'가 가라고 하는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든 증거를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싸우니까 말려야 하는데, 팔을 엄청 붙잡고 뜯어말렸다. 한국에서는 카메라 나오려고 노력도 안 하지만, 이때는 어떻게든 증거를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열심히 했던 것 같다(웃음).
 
촬영본을 살피니, 나랑 쿠보즈카 요스케와 건너편에 있는 앤드류 가필드, 아담 드라이버가 서로 눈빛으로 교감하는 장면을 보게 됐다. 이게 정말 액션, 리액션이고 서로 주고받고 있다는 생각이 너무나 강하게 들었다. 이 친구가 나를 배우로 인정하고 있구나 생각했다. 한국·미국·일본 대표 배우의 불꽃 튀는 리액션이구나 싶어서 기분이 너무 좋았다. 앤드류 가필드가 수고했다고 해서, "유 튜"라고 해줬다. 지금은 몰랐는데, 그때 연기를 너무나 잘했다. 시사회로 영화를 보니, 정말 좋은 배우라고 생각해서 다시 한번 같이 해보고 싶다.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앤드류 가필드가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ㄴ 강남에 일 때문에 갔는데, 버스에 '핵소 고지'의 앤드류 가필드 광고가 보였다. "반드시, 다시 너랑 만날 것이다"라는 생각을 딱 했다.
 
   
▲ '사일런스'에서 남정우 배우(왼쪽에서 네 번째)가 출연한 장면.
 
그렇게 촬영을 마쳤는데, 어떤 장면에 나오는지 살짝 알려 달라.
ㄴ '기치지로'가 처음 도착한 도모기라는 마을의 주민 역할이다. 거기서 나는 이름도 없다(웃음). 시사회를 통해서 영화를 봤는데, 얼굴이 그나마 몇 번 잡힌 거에 대해서 정말 감사했다. 한국 예고편에는 없지만, 인터내셔널 예고편에는 사진이 있다. 쭉 서 있는 사람 중에 4번째다. 지인들은 못 찾는다. 얼굴도 검은색으로 칠해서, 나만 알아볼 수 있다. 심지어 어머니도 모르셨다(웃음).
 
촬영 후 진행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할리우드 진출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밝혔다. 정말 진출 생각이 없나?
ㄴ 매우 두려웠다. 이 일을 추진하면서 내 생각에도 너무 허황하고, 미친 사람 같았다. 촬영하고 싶어서 대만을 가겠다는 내 말에도 '미쳤다'는 말을 제일 많이 들었다(웃음). 할리우드 진출은 가당치도 않다.
 
관객이 이 작품을 어떻게 봤으면 좋겠는가?
ㄴ 종교적이지만,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다. '극한의 상황에서 내 신념을 어떻게 지킬까', '그 판단이 맞는 걸까'가 주된 내용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을 집중적으로 타겟팅하기 위한 카피 때문에 종교적 색채가 더 짙어진 것 같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건 신념의 문제다.
 
지금은 차기작 계획이 없나?
ㄴ '청춘밴드 ZERO' 특별 공연으로 잠깐 작업을 할 것 같다. 다른 작품들도 같이 해보자는 얘기는 있는데 확정이 아니라서 말을 못하겠다(웃음). '사일런스' 득을 크게 보고 있다. 연락도 많이 오고, 인터넷 매체 같은 곳에서 화상인터뷰도 한다. 사실 나로서는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거라서 지치기도 하지만 지금 알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계속 자기 홍보를 하고 있다.
 
   
 
 
2015년 촬영 후에 쟁점이 됐을 때는 대만에 있었기 때문에, 직접 체감하지 못했다. 검색어 1위를 할 때도 주변에서 더 반응이 좋았고, 난 촬영만 하고 있었다. '사일런스'에 출연했다고 내 인생이 달라지는 건 아닐 거라는 생각이 컸기 때문이다. 역시나 달라진 점은 없었고, 그 후 2년 동안 작품 오디션 한 번 보기도 힘들었다. 
 
그러다가 작년에 다시 이슈가 됐고, 이젠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될 것 같았다. 어떻게든 이슈를 만들어야 했다. 다시 시작하고 싶어서 내 기사들, 녹음했던 파일들 모두 뿌리고 다녔다(웃음). 다 지나간 일이고 좋은 추억으로 묻어두고 싶었지만, 이번 기회로 차기작 걱정 없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것도 내 속마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사일런스' 출연으로 소원 하나를 이뤘다.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은?
ㄴ 차기작을 걱정하지 않는 것이 당장 목표다. 더 좋은 작품에서 더 좋은 배역 해보고 싶다. 또한, 연기하면서 행복하고 즐거웠으면 좋겠다. 괴롭고 치열한 작업이 많겠지만, 내 작품을 보면서 즐거워하는 관객을 보면 그게 딴따라의 즐거움이다. 고비를 넘어 성장하는 날 발견할 때가 가장 즐겁다. 이기적이지만 내가 즐거운 작품이 우선이다.
 
[글] 문화뉴스 양미르 기자 mir@mhns.co.kr
[정리] 문화뉴스 박다율 인턴기자 1004@mhns.co.kr
[사진·영상] 문화뉴스 이민혜 기자 pinkcat@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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