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문화뉴스 아티스트에디터(아띠에터) 김효상 playticket@mhns.co.kr 플레이티켓 대표·공연전문프로그램 마포FM 김효상의 '플레이

[문화뉴스] 공연을 소개하고 공연을 이야기하고 공연을 만나보는 공연전문방송 플레이투스테이지

플레이투스테이지 50회 게스트는 예술가 심철종이다.

2013 거창 국제 연극제 개막작 "100인의 햄릿" 제작 연출
2015 제19회 온달문화축제기념 특별공연-스펙터클역사대서사극 [아단성] 연출
2016 유네스코 등재를 위한 특별공연-인류 최초의 싸인 [반구대 암각화] 연출

현 씨어터제로 대표
광화문 '세상에서 제일 작은 한 평 극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그곳에서 '심철종의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공연을 매주 수요일마다 상설로 하고 있다.

 

[▶]을 누르면 이번 인터뷰가 실린 공연전문방송 플레이투스테이지 50회 방송을 들을 수 있습니다.(클릭)

 

   
예술가 심철종

Q. 연극배우와 연출, 그리고 기획까지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하였는데 그간의 이력을 듣고 싶다.

ㄴ 현대극단에서 출발하여 국립극장 연기 연수원을 수료하였다. 현대극단 시절엔 故 김상열 선생님께 배웠고 이후에는 당시 미국 유학을 다녀오신 김수남 선생님께 연기와 호흡에 관련된 것들을 많이 배웠다. 그분은 미국에서 배운 연기 훈련법을 나에게 전수했고 나는 그분이 펴낸 연기론 책 안에서 모델이 되었다.

그리고 국립극장 연수원에 들어가서 1년 동안 모든 분야의 예술에 대해서 두루 배웠다. 대한민국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에게 보고 배운 좋은 기회였다. 연극을 비롯하여 판소리, 국악기, 한국무용, 발레 등을 배우며 전속 단체 작품에 단역으로 출연하였다. 내가 2기생인데 거기서 배출한 연수생 중엔 현재 유명한 배우들이 많다. 당시 주위 사람들은 나의 예술적인 학습능력을 보고 국악이나 무용 등 다른 장르를 해보라고 추천하기도 했지만 난 연극에 더 애착이 갔고 그중에서도 아방가르드한 작품에 관심이 있었다.

80년대엔 뜻이 맞는 친구 7~8명과 5천 원씩 걷어서 공연을 만들었다. 아주 적은 제작비로도 가능했던 시기였다. 충무로 대한극장 뒤편에 주택의 차고를 개조한 건넌방 소극장에 있었는데 거기서 이런저런 실험적인 공연을 많이 했었다.

내가 하는 작품은 80년대에는 별로 인정을 못 받았다. 하지만 88년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우리나라 예술계도 많이 변했다. 해외의 모던한 작품들이 국내에 많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런 실험적인 공연들을 보면서 오히려 내가 추구하는 예술관에 자신감을 얻었다. 그간 내가 하고 있던 공연이 세계연극의 흐름에 이미 부합하고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86년 바탕골소극장에서 공연했는데 16mm 카메라로 난지도 쓰레기매립장에서부터 공연장으로 들어오는 내 모습을 영상으로 찍은 것을 보여주고 그 영상과 연결해서 무대에 등장하는 것이었다. 지금에야 별것 아닌 테크닉이지만 당시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아마 내가 최초로 그런 시도를 하지 않았을까 싶다. '원시인이 되기 위한 벙어리몸짓'이라는 제목도 특이했던 작품이다. 8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아방가르드 예술을 추구하는 음악가와 미술 분야의 예술가와 함께 팀을 꾸려서 활동했다. 정치적인 이슈도 뜨거울 때여서 우리의 작품에 대해서 당시 안기부에서 뒷조사가 나올 정도였다.

 

 

   
플스 50회 게스트 심철종

Q. 공연계에서 이단취급을 받지는 않았는가?

ㄴ 나는 연극영화과 출신도 아니고 명문대를 나온 것도 아니다. 그리고 나의 철학은 연극을 할 때 어떤 장르라고 규정하지 않는 것이다. 80년대 당시는 지금보다 훨씬 더 학벌을 중요시하던 때다. 나의 작품이 특이해서 신문에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오는 때가 많았는데 나름대로 인터뷰 분량에 맞추느라 지면이 얼마나 할애 될 예정인가는 내가 먼저 물어보고 답변을 준비했다. 하지만 기자들은 내 나이와 출신학교를 묻는 것을 제일 먼저 했다. 내가 비전공자라는 것을 알고 나면 계획했던 것보다 기사 지면이 줄어들게 되는 것을 자주 경험했다. 그 뒤로는 한동안 인터뷰에 대한 다소 거부반응이 생기기도 했다.

 

Q. 페스티벌 및 외국과의 교류공연도 활발히 하였는데 특히 기억에 남는 작업이 있었다면?

ㄴ 정치적인 상황에 대해서만큼은 많이 싸웠지만 내 예술세계에 있어서 일본이란 나라는 나에게 스승과도 같은 큰 영향을 끼쳤다. '심철종의 개'라는 공연을 한 적이 있다. 실제 개를 무대에 세우고 현대의 인간이 개가 되어간다는 메시지를 담은 모노드라마였다. 그 공연을 일본사람이 보고 나를 일본에 초청했다. 긴자의 이누(개), 다카다노바바의 이누 등 지역의 이름을 붙여 일본 각지를 돌면서 공연을 했다. 그것이 한국의 공연환경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던 나에게 커다란 활력소와 전환점이 되었다. 당시 후쿠시마국제퍼포먼스 페스티벌에 참가해서 그해 최고의 스타로 선정되었다. 그 뒤 일본 현지 기획사가 생겼고 일 년에 10여 차례 일본을 다니면서 공연을 했다. 그러면서 일본의 건축, 미술 등을 접하게 된 것이다. 딱히 스승이 있었다기보다 일본이란 환경이 나에게 예술적인 스승이 되었다.

 

 

   
세상에서 제일 작은 한평극장 공연 중

Q. 본인만의 작품세계가 더 공고해졌을 것 같다.

ㄴ 98년도에 최초로 실험극이라는 장르의 지원이 생겼다. 지금의 문화예술위원회 사업이었는데 내가 그 지원사업의 첫 수혜자가 된 것이다. 그전에도 실험극이라는 개념은 있었지만, 실험극이라는 카테고리를 별도로 만들어 지원하게 된 게 그때가 처음이었다. 심사위원도 그렇고 나 자신도 어깨가 무거웠다. 내가 그 지원금으로 공연을 잘못 만들면 그 뒤로는 실험극에 대한 지원이 지속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 지원금으로 한강에서 '자동차씨 모의재판'이란 작품을 올렸다. 자동차가 사람들에게 끼치는 해악을 표현한 것이었는데 다행히 혹평을 받지 않아 지금까지도 다원 예술과 같은 이름으로 특이한 장르에 대해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어서 자부심이 느껴진다.

 

Q. 배우와 연출, 그리고 기획을 하였을 때 공연작업을 할 때 각각의 차이점이 있다면?

ㄴ 연극을 처음 시작할 때는 사실 배우만 하고 싶었고 어렸을 땐 화가를 꿈꾸기도 했다. 그리고 다양한 예술 장르에 관심을 가지며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내가 생각하는 예술적 에너지가 단지 배우 역할로만 표출되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점점 배우라는 타이틀에 머무르기보단 예술가라는 포괄적인 개념을 지향해왔다.

어떤 작품을 고민할 때 머릿속에 무대의 비주얼이 먼저 그려진다. 배우로 출발했지만, 점점 연출적인 재미를 느끼고 영역을 확대한 것이다. 이렇듯 배우와 연출은 어느 정도 연장선에 있지만, 기획을 할 때는 사실 제일 어려움을 느낀다. 재원마련부터, 스태프를 꾸리는 것 그리고 홍보마케팅을 하는 것까지 너무 힘든 과정을 겪는다. 우리나라 공연환경이 연출가가 연출적인 것에만 고민할 수 있는 상황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거창국제연극제 100인의 햄릿

Q. <세상에서 제일 작은 한 평 극장>을 운영하고 있다. 설립하게 된 배경과 취지는?

ㄴ 나이가 들수록 내가 맡은 프로젝트의 규모가 커지게 되었다. 잘못하면 내 마인드가 상업적으로 변질할 우려가 있다고 생각했다. 점차 나의 본질을 고민하게 됐다. 일본에 젓가락을 만드는 회사가 있다. 아주 다양한 젓가락을 만들고 금으로 된 것 등 고급스럽고 값비싼 젓가락도 만든다. 그 회사건물에 들어가면 초입에 젓가락이 한 벌 전시되어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나뭇가지를 깎아서 만든 수수한 젓가락이다. 소풍 갔을 때 젓가락이 없으면 임시방편으로 엉성하게 깎아서 만들어 쓰곤 하던 어린 시절 추억이 담긴 바로 그 젓가락이다. 그걸 보고 그 회사를 신뢰하게 됐다.

나의 한 평 극장 운영도 바로 그런 정신이라 생각한다.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지금에야 어떠한 대형프로젝트도 할 수 있지만, 나의 원래 마음은 소박하게 관객들과 무대에서 공감하고 싶어 연극에 입문했기 때문이다. 그 마음을 잊고 싶지 않았다. 한 평 극장을 시작한 지는 5년 됐고 홍보를 적극적으로 하라는 주위의 조언을 들었지만, 일부러 자제하였다. 무리하게 홍보를 하다 보면 또 상업적으로 변하고 이것을 앞세워 이슈를 만들고자 마음이 변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현재는 한두 명의 관객이라도 소중하게 생각하며 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있는 듯, 없는 듯한 공간으로 남길 바란다.

 

Q. 실제 거주하는 집에서 혼자 공연한다는 것이 어떤가?

ㄴ 사실 스태프도 없이 혼자서 진행하고 있다. 스태프가 없어서 공연을 못 하는 일도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구의 도움과 제약도 없이 오로지 관객만을 신경 쓰며 공연하고 싶었다. 사생활이 엿보는 것이 나와 관객들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심플한 삶을 살기 때문에 사적인 면을 보여주는 것은 거의 없다. 남의 집이라 관객들이 어색해할 것 같지만 여태까지 그런 관객을 보진 못했다.

 

   
2017 심철종의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Q. 여기서 하는 공연은?

ㄴ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햄릿의 대사를 인용한 제목의 공연을 하고 있다. 기억과 사랑, 죽음의 테마로 연결되어있고 연극인가 현실인가라는 것을 규정하고 싶지 않았다. 과도하게 연극적인 것을 보여주고 싶지도 않았다. 이 모든 주제가 인간의 삶에 늘 붙어있는 요소이고 나와 가까운 이야기로 만들었다.

죽음을 예로 들자면 누군가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죽음을 이야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오히려 죽음을 자꾸 상기하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유한한 존재이고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과 언젠가 이별한다는 걸 깨달았을 때 비로소 주위의 것들을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도 죽음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워진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내용도 공연에 담고 싶었다. 사실 우리는 무한한 우주의 공간에 비교해볼 때 한 평도 안 되는 작은 곳에 묻힌다. 공연을 보러 왔을 때 죽음과 삶의 경계 선상에서 맛보는 묘한 느낌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것이 한 평 극장이 주는 숨은 의미다. 편안함과 긴장감이 교차하는 팽팽한 에너지 속에서 느껴지는 색다른 기분을 맛볼 것이다.

 

Q. 이러한 하우스 공연문화가 연극계에도 확산되기를 바라는가?

ㄴ 음악공연은 하우스 공연을 하기 편하겠지만 사실 연극은 쉽지 않다. 나는 모노드라마라고 하기엔 일반적인 연극에서의 접근법과 다르게 생각하지만 보통 연극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면 한 시간 이상을 기승전결 구조에 맞춘 연극적인 에너지로 채워가는 것을 생각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많은 배우가 이 하우스 연극을 쉽게 도전하긴 힘들다.

또 하우스 공연문화가 붐을 일으킨다는 측면에서 봤을 때 이것 역시 대단한 이슈가 되기보단 자연스러운 문화가 되길 바란다. 예술을 예술이라고 거창하게 떠드는 것이 오히려 후진국의 접근법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어느 동네에 가면 늘 있는 것처럼 소극장공연이나 갤러리도 그렇게 존재하길 바란다.

   
플스 50회 방송을 마치고

 

※ 본 칼럼은 아띠에터의 기고로 이뤄져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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