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읽어주는 남자 #040 김태윤 감독의 '재심'

   
문화뉴스 아티스트 에디터 강해인 starskylight@mhns.co.kr 영화를 보고, 읽고, 해독하며 글을 씁니다. 좋은 영화는 많은 독자를 가진 영화라 믿고, 오늘도 영화를 읽습니다.
[문화뉴스] * 영화 '재심'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약촌 오거리에서 있었던 살인 사건 및 재판을 다루는 '재심'은 하나의 사건에 얽힌 다수의 피해자와 다수의 가해자에 관한 영화다.
 
무고한 피해자를 보는 것은 가슴 아프지만, 상식을 져버린 인물과 소시민을 외면한 법과 마주하는 건 상당히 분노가 차오르는 일이다.
 
'재심'은 사람을 환장하게 할 만한 인간들이 득실거린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라 그런지, 영화가 주는 긴장감은 생각보다는 크지 않다. 그렇다고 주인공 준영(정우)이 신념과 가치관, 그리고 현우(강하늘)를 향한 믿음 앞에 보이는 내적 갈등이 강렬하게 묘사된 편도 아니다.
 
   
 
 
카메라 역시, 일어났던 사건을 조명하고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차 보였다. 결론적으로 '재심'은 영화가 보여주는 힘이, 실화의 무게와 배우의 강렬한 연기엔 미치지 못한다.
 
그렇다면, '재심'은 어떤 의미가 있는 영화일까. 김태윤 감독이 영화로 약촌 오거리 사건을 다루면서 보여주려 했던 건 무엇일까. 감독의 의도를 추측하는 것부터가 이 영화를 읽기 위한 선제 조건으로 보인다.

피해자와 마주하게 하는 영화
김태윤 감독이 '재심'으로 바란 것을 추측하는 데엔 그의 전작이 중요한 열쇠 역할을 할 수 있다. 김태윤 감독의 연출 데뷔작인 '또 하나의 약속'은 반도체 공장 노동자들의 백혈병 발병에 대한 책임을 회피한 '삼성전자'를 고발하는 이야기였다. 억울한 피해자와 이를 외면한 집단, 그리고 구성원이 있었다는 점에서 '재심'과 유사점이 많다.
 
'또 하나의 약속'과 '재심'은 재판이 중심에 있지만, 법정 스릴러 혹은 그런 유사 장르가 시도한 카타르시스를 원하지 않는다. 대신, 피해자의 억울함을 보여주고, 잘못된 것의 원상 복귀, 그리고 사회 제도의 정상적인 역할을 바란다.
 
   
 
 
'또 하나의 약속'이 자본주의 시스템의 추악한 면을 보여줬다면, '재심'은 검사, 경찰 등 공권력의 타락을 다룬다. 자본주의든 재판이든 약자에겐 언제나 불공평함을 지속해서 말하고 있다. 이 불공평함을 영화로 비추고, 관객에게 피해자의 얼굴을 관객에게 마주 보라고 한다. 사건을 파헤치는 것은 '그것이 알고싶다' 등의 탐사보도 프로그램이 했고, 해야 할 일이다. 그 대신, '재심'이 영화로서 선택한 건 피해자의 표정에 포커스를 맞추는 것이었다.
 
글의 시작에 말했듯, '재심'은 하나의 사건에 얽힌 다수의 피해자와 다수의 가해자에 관한 영화다. 특히, '다수의 피해자'라는 부분이 중요하다. 이 영화는 옳고 그름, 그리고 무죄의 확증보다, 하나의 부조리가 양산한 '많은' 피해자의 얼굴에 주목했다.
 
   
 
 
약촌 오거리 사건은 하나의 가해자와 한 명의 죽음으로 시작해, 몇 명의 가해자와 다수의 피해자로 확장한다. '재심'의 카메라는 현우와 현우의 엄마(김해숙), 살인자의 친구 등 사건과 무관했던 이들이 마주했던 절망적 세상과 그걸 마주한 그들의 표정을 담는 데 애썼다. 여기서, 억울한 재판을 목격한 현우의 엄마가 시각을 잃었다는 설정은 상징적이다. 눈을 뜨고도 억울함을 막지 못한 그녀에게 눈은, 이 부조리한 세상에 있으나 마나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목격자를 소환하는 것
현시대, 더구나 병신년을 통과한 관객 중, 막연히 사회는 아름답고, 완벽히 정의롭다고 믿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이미 알고, 느끼던 사회의 부조리를 김태윤 감독은 '재심'을 통해 한 번 더 보라고 한다. 추측에 불과하지만, 이런 걸 또 보여준 이유는 관객에게 아는 것에 그치지 말고, 무관심하지 말아 달라는 요청으로 보인다. 억울한 피해자의 한을 풀어주는 것을 초월해, 애초에 피해자를 만들지 말아 달라고, '재심' 자체가 필요 없기를 요청한다.
 
'재심'엔 현우의 억울함을 막을 수 있던 목격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제 삶의 안정과 유지를 위해 외면하는 방법을 택한다. 혹은, 자신의 관심이 부질없다는 무력함이 만든 선택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모든 걸 제자리로 돌릴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애초에 더 큰 피해자를 만들지 않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목격자 및 고발자임을 '재심'은 말한다.
 
   
 
예정된 패배로 향하는 '재심'
'재심'은 '재심'을 통해 정의를 되찾는 과정을 보여주지만, 사실 어떻게든 피해자의 패배와 마주하게 된다. 더 명확히 말하면, 피해자들의 무너진 세계, 깊게 패인 상처를 보게 한다. '재심'을 통해 가해자에겐 어떤 종류의 벌을 줄 수 있지만, 피해자가 잃은 시간과 상처는 무엇으로도 되돌릴 수 없을 것이다. 약간의 위안을 얻는 정도일까. 패배를 전제로 한 싸움. 자신의 패배를 목격하면서라도 되찾고자 한 진실과 정의. 당연한 것을 찾는 이 과정은 너무도 잔인하다. 애초에 이런 일이 없었어야 한다. 
 
'재심'은 '재심'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애초에 죄 없는 피해자가 없어야 한다고 말하는 영화로 읽힌다. 부조리 앞에 무너지는 한 개인의 세계를 목격했다면, 나중에 되돌리지 말고, 바로 지금 되돌리는 게 낫다. 그리고 눈을 잃기 전에, 눈의 역할을 다하라고 '재심'은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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