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뉴스] 70분간 우리는 세계 1차 대전 속 벙커의 한복판으로 빠진다.

연극 '벙커 트릴로지'는 '카포네 트릴로지', '사이레니아' 등 독특한 작품을 만든 제스로 컴튼의 작품으로 세계 1차 대전 속 참호를 배경으로 공연된 작품이다. '트릴로지' 답게 '아가멤논', '맥베스', '모르가나' 세 편의 옴니버스 에피소드로 만들어져 있는 작품으로 꼭 세 편을 다 보지 않아도 좋고, 개별적인 이야기로서의 완성도가 뛰어나지만, 아마 한 편을 보면 다른 두 편도 보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관객을 끌어당기는 흡인력과 재미가 있다.

이 작품은 전체를 관통하는 전쟁 속 인간의 고뇌를 신화, 고전을 각색한 소재로 다뤘다. '아가멤논'은 영국인 아내와 독일인 군인인 남편 간의 사랑 이야기를, '모르가나'는 전쟁 속 희생되는 세 친구의 무너진 우정을, '맥베스'는 극 중 극 '맥베스'를 통해 욕망, 권력 앞에 약해지는 인간을 그려 낸다.

   
 

네 명의 배우는 작품마다 배역을 바꿔 가며 훌륭한 연기 변신을 선보이는데 김지현, 정연 배우의 '솔져 4'는 1차 대전을 다룬 작품의 시대적 배경상 남자 배역의 상대역으로만 한정 지어질 우려가 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훌륭한 한국 제작진의 각색으로 '아가멤논'에선 당시 시대적 배경인 여성참정권 운동 '서프러제트'와 결합해 능동적인 여성상을 그려내며 '원작보다 더 나은' 작품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전쟁을 다룬 작품에서 늘 여성이 희생자로 두드러진 것에 비해 사랑하는 남편과 전쟁, 차별 속에서 힘들어한 여성을 그려낸 '아가멤논'은 무척 인상적이다. 극 중 극을 효과적으로 이용한 '맥베스'나 평범한 이름을 외친 엔딩이 인상 깊은 '모르가나' 역시 훌륭한 작품이다.

   
 

연극 '벙커 트릴로지'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숫자'와 '인간'의 틈을 관객에게 여지없이 보여 준다. 21세기 들어 우리는 쉽게 몇백, 몇천을 넘어 몇백만 같은 단위도 쉽게 접한다. 하지만 숫자로, 글자로 정리된 것과 그것을 실제로 접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고 '벙커 트릴로지'는 그것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1차 세계 대전에서 죽은 '천만 명'은 그저 많은 숫자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아가멤논', '모르가나', '맥베스'로 변해 관객의 눈 앞에 펼쳐질 때 우리는 천만 명의 진실에 더욱 다가갈 수 있다.

   
 

연극 '벙커 트릴로지'는 이처럼 관객이 느낄 숫자와 인간 사이의 틈을 '공연'이라는 생생한 장르로 메워줌으로써 극적 재미를 넘어 전쟁의 부도덕함을 상기시키는 윤리적, 예술적 성취를 이뤄낸다. 그런 맥락에서 안내 방송에서 관객의 안전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부분은 사실 이 공연의 가장 큰 미덕이다.

마지막으로 이것들이 가능케 한 프로덕션의 힘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섬세한 음향을 비롯해 입장 통로부터 참호의 현장감이 느껴지게 만든 프로덕션의 힘은 100명의 관객을 70분 동안 '벙커 트릴로지'의 세계로 완벽히 몰입시킨다.

   
 

솔져 1에 이석준, 박훈, 솔져 2에 오종혁, 신성민, 솔져 3에 이승원, 임철수, 솔져 4에 김지현, 정연이 출연한 연극 '벙커 트릴로지'는 2월 19일까지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에서 공연된다.

문화뉴스 서정준 기자 some@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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