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뉴스 아티스트 에디터 강해인 starskylight@mhns.co.kr 영화를 보고, 읽고, 해독하며 글을 씁니다. 좋은 영화는 많은 독자를 가진 영화라 믿고, 오늘도 영화를 읽습니다.
 
이 영화를 해피 엔딩으로 볼 수 없는 건, 지선이 돌아온 세계가 여전히 무능력한 남성의 세계였다는 거다. '미씽: 사라진 여자'(이하 '미씽')에서 지선은 자신이 속한 시스템의 문제와 균열을 마주했고, 그 시스템의 도움 없이 아이를 구했다.
 
그런데 마지막에 지선이 돌아온 세계는 여전히 자신을 돕지 못할, 그 시스템이 그대로 작동하는 사회였다. 지선이 돌아온 뒤 그 사회가 변할 가능성을 어디서 볼 수 있었나.
 
   
 
 
이 문제적 남성 세계의 민얼굴을 까발린 건, 지선이 아니라 한매였었고, 한매는 납치범이지만 유일하게 지선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던 인물이었다. '미씽'은 마지막에 한매를 죽임으로써, 기존의 시스템(무능력한 남성공권력 및 폭력적 가부장제)을 방어한다. 물론, 한매의 죽음을 범죄에 대한 인과응보의 결말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살아남은 여성(지선)과 죽은 여성(한매)을 비교·대조해보면,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모성 신화를 완성하는 영화
두 여성에게 공통으로 보이는 것은 아이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과 희생이다. 두 여성은 아이를 위해 힘들고, 비참하고, 폭력적인 순간을 견딘다. 반쯤 미쳐 한매(공효진)를 쫓는 지선(엄지원). 아이를 위해 장기를 팔고, 성을 팔고, (정신·육체적으로 모든 것을 판) 시댁의 폭력을 견디는 한매를 움직이는 동력은 아이였다. '미씽'에서 아이를 향한 두 사람의 마음은 그들의 행위를 다른 차원에서 바라보게 한다. 아이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 앞에 지선의 광기는 숭고함이 되고, 한매의 잔혹한 유괴는 연민을 불러오는 비극이 되어 관객에게 울컥하는 순간을 준다.
 
어머니의 맹목적인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 '모성'. 이 단어는 강렬한 힘이자 아름다운 동기로 보인다. 그런데 '모성'은 가끔 여성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하는 감정이자 의무적인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 모성이라는 단어가 누군가에게 강요될 때, 그리고 모든 것을 견뎌내고, 희생해라 명령하는 권력으로 느껴질 때, 이는 여성에게 폭력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때, 모성은 사회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여성이 짊어져야 하는 책무가 될 수 있다. 이는 모성이 의도적으로 '신화' 화 된 것이다. 사회 존속을 위해 도구화된 것이다.
 
   
 
 
잠깐 짚고 넘어가자면, 글을 마무리하던 중 '미씽' 이언희 감독의 '씨네21' 인터뷰를 읽었다. '미씽'이 모성에 대한 이야기로 오독하는 사람이 있다는 질문에 감독은 이렇게 답했다.

"한매가 아이에게 집착하는 건 특별한 모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한매 인생에서 지키고 싶은 것이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한매의 모성을 찬양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앞서 모성이란 단어를 정의하며 신화화된 폭력이 될 수 있음을 경계했기에, 애초에 '미씽'을 모성을 찬양하는 영화라고는 읽지 않았다. 모성이란 표현 대신, 지선과 한매의 동기를 '아이를 향한 자발적인 강렬한 사랑' 정도로 정리하려 했다. 그런데, '미씽'의 결말은 감독이 부정하려 한 '모성 신화'를 재생산하는 공간으로 지선을 다시 데려간다. 한매가 죽음으로써 영화는 여러 가지 도식을 완성하는데, 그 중심엔 '모성' 신화처럼 보이는 게 있었고, 이는 이 영화에 대한 기대를 산산 조각냈다. 이 영화를 도식화해보자.
 
살아남은 여성인 지선은 아이를 구한 여성이다. 반면 한매는 아이의 죽음을 목격한(구하지 못한) 여성이다. '미씽'은 결말에서 한매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데, 이를 간단히 도식화한다면, 아이를 지킨 강인한 여성은 살았고, 아이를 지키지 못한 무능한 여성은 죽은 게 된다. 한매가 더러운 꼴을 보며 발버둥 친 과정들은 죽음으로 산화하고, 남은 결말은 하나. 제 자식을 구하지 못한 여성, 즉 현재 작동하는 시스템을 유지하는데(아이를 건강히 키우는데) 도움이 되지 못한 자의 처벌이다. '미씽'의 세계에서 육아는 여성이 맡아야할 과업으로 표현되는데, 한매는 그 세계가 요구한 조건을 어긴 것이다.
 
   
 
그렇게 '미씽'은 숭고한 모성 신화(아이의 육아를 위한 맹목적 희생)가 지켜져야 한다는 걸 옹호한다. 한매가 죽은 것을 너무 극단적으로, 편견으로 바라본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를 보완해줄 근거들은 몇 가지 더 있다. '미씽'이 한매의 죽음으로 얻은 게 이 뿐만이 아니라는 점. 그러니까, 한매의 죽음으로 기존 '미씽' 세계의 시스템을 더 확고하게 만드는 걸 몇 가지 더 볼 수 있다. 
 
기존 시스템(남성 가부장제)을 방어하는 영화
살아남은 지선은 한국 사회 내에서 착실히 일을 하는 내부자였다. 상사에게서 성차별적 폭언을 듣지만, 저항하지 않고 순응한다. 그녀는 '워킹 맘'으로서 가정과 직장의 업무를 당연한 듯 이중으로 해내고, 이 사회가 요구한 것들에 맞춰 삶을 이어가고 있다. 그녀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이 시스템에 문제가 있음을 느끼고는 있다. 그런데도 이 사회에 균열을 전혀 내지 못하고, 그럴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지선이 얻는 것도 있기는 있다. 그녀는 이 시스템에 순응하려는 자세를 보였기 때문에, 이 사회가 만든 (부실하지만) 사회 안전망에 발을 걸칠 수라도 있었다. 즉, 끝까지 내부자일 수 있었다.
 
죽은 한매는 한국 사회에 속하지 못한 외부자다. '미씽' 세계의 하층민으로, 심지어 한국인도 아니다. 그녀는 어디서도 소속을 인정받지 못했다. 그녀의 존재 이유는 아이를 낳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며, 도구적 존재인 한매에게 그녀의 시댁은 이 사회와 소통할 언어조차 주지 않는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한매는 이 사회와 소통할 필요가 없다. 그녀는 이 사회가 인정하는 구성원이 아니니까. 그녀는 끝까지 외부자였다.
 
한매는 남성 가부장제를 유지(대를 이을 자식을 재생산)하기 위한 음지의 수단이자 도구이며, 그 과정에서 이 사회가 감추고 싶을 추악한 면을 목격한 외부자다. 더 최악으로 그녀는 물리적 폭력까지 경험한다. 하지만, 지선과 달리 사회 안전망에 전혀 기대할 수 없다.
 
   
 
그녀에게 이 사회는 아무런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 듯했고, (그녀가 유일하게 허락된 공간은 성을 판매하는 공간, 즉 음지였다) 결말에서 목격자이자 피해자인 그녀를 죽임으로써, 그녀를 감싸고 있던 '미씽'의 남성 가부장제 시스템은 죄악을 잊는다. 한매가 죽어서 이 시스템은 더는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한매의 죽음은 '미씽'의 남성 세계에 면죄부를 준다.
 
여기에 한매는 고전적 의미로 남성 가부장제 세계에 죄를 하나 더 지었다. 한매가 아이를 살릴 돈을 얻기 위해 성을 판매하는 여성이었다는 것. 이 점은 그녀의 죽음에 하나의 의미를 더 추가할 수 있게 한다. 그녀는 '미씽'의 세계에서 성적으로 문란한, 타락한 여성이었다. "성은 성스러운 것, 순결해야 하는 것" 등의 프레임은 성녀/창녀의 이분법에서 오는 것인데, 이 역시 남성 위주의 세계를 견고히 하려는 또 다른 신화이며, 이는 여성을 억압하는 편견의 족쇄로 작동할 수도 있다.
 
여성의 문란함은 순결의 파괴를 뜻하고, 남성 위주의 세계에 상당히 거슬리는 일이었다. (남성 판타지에 거슬리는 일이기도 했고, 친자 판별이 불가능했던 시대엔 자식의 출처(?)가 꽤 중요한 일이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과거의 이야기엔 문란한 여성은 사회에 위험이 되기에 벌을 받는 전개가 꽤 많이 있었다. '미씽'은 한매를 죽임으로써 성적으로 타락한 여성을 제거하는 순결한 서사로 끝났고, 영화 내의 남성 가부장제 시스템을 안전하고, 청결한 상태로 유지한다.
 
모성 신화 완성, 시스템의 유지라는 도식을 통해 한매의 죽음은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를 가져올 수 있음을 봤다. 이런 생각 때문에 '미씽'의 결말은 지선에게 절대로 행복할 수 없다. 남성 가부장제의 세계로 귀환한 지선이 어디서 행복할 수 있을까. 이 영화는 지선이라는 '여성'에게 부조리와 폭력을 가한 남성 가부장제 시스템이 변할, 조금의 가능성도 남기지 않았다. 여기서 다시 묻는다. 지선은 되찾은 아이와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영화가 마주할 엔딩 다음의 엔딩
뭉클한 아이의 걸음마 뒤엔 이런 일들이 있을 것이다. 아이를 돌볼 수 없는 워킹 맘이 선택했던 보모는 아이를 납치에 휩쓸리게 했다. 이 영화 속 사회는 보모를 고용한 여성(지선)에게 분명 책임을 물을 것이다. 그리고 이 사회는 모성 신화를 작동해, 아이를 돌볼 능력이 없는 사람이자 아이를 큰 위험에 노출했다는 이유로 지선을 엄마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을 것이다. 이미 소송이 진행 중이던 지선은 더 불리해질 것이다.
 
그리고 지선이 무능한 공권력을 초월하면서 보여준 '광기'도 문제가 될 것이다. 이 광기는 후에 지선을 평가할 때, 이성적이지 못한 엄마이자 육아 중 아이를 위험하게 할 수 있다는 또 다른 낙인의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 공권력은 그들의 무능을 반성하기 전에, 지선이라는 인물에게 결점을 계속 만들어, 그녀를 탓하고 처벌할 것이다.
 
그녀의 직장은 또 어떤가. 그녀의 편협한 상사는 이 사건을 계기로 워킹 맘을 더 차별하고 혐오할 것이다. 바람을 피운 것 같은 뉘앙스를 주는 지선의 남편은 또 어떤가. 그는 아이의 납치를 무능한 지선의 탓으로 돌리고, 불쌍한 아버지로서 오히려 이 사회의 연민을 얻을 것 같지 않은가. 유괴 사건 전후로 남성 가부장제 시스템이 전혀 변하지 않았기에, 지선은 아이를 구했지만, 더 고립될 것이다.
 
'미씽'은 지선을 완전히 산산조각내지만, 그녀에게 단 하나의 탈출구도 만들어 두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반어적이게도 지선을 이해한 유일한 인물은 한매였고, 어쩌면 아이와 함께할 방법도 한매에게 있었다. 이 영화가 진정한 해피 엔딩을 원했다면, 여성에게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었다면, 지선에게 아이와 함께 살아갈 힘과 방법을 주던가, 이 남성 세계의 부조리한 시스템이 변할 일말의 가능성을 줬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 무너지고, 반성하는 남성 가부장의 세계를 보여줘야만 했다. 하지만 '미씽'은 그러지 못했다.
 
   
 
 
이렇게 남성 가부장 세계의 붕괴를 보여주기 힘들었다면, '미씽'이 보여줄 수 있던 것은 지선과 한매의 연대를 통한 제3의 길이었다. 한매를 살리고 지선과 연대해, 시스템 밖에서 행복을 구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보여줘야 했다. 두 여성이 전혀 다른 공간에서 한 아이를 돌보는, 대안 가족을 암시해줬어도 꽤 괜찮은 엔딩이었을 것이다. 하나의 예로, 올해 '굿바이 싱글'은 색다른 여성 인물들의 연대를 통해, 대안 가족을 보여주며 근사한 끝을 보여 줬었다.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 이후 모처럼 느낀 색다름, 그리고 가능성이었는데 '미씽'은 그 순간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미씽'은 영화 속에서 남성의 부조리한 세계를 휘저어 놓기는 했지만, 결국 그 세계를 넘지도 못했고, 다른 길도 찾지 못했고, 오히려 그 세계를 더 단단하게 했다. 한매라는 외부자=창녀=아이를 못 지킨 여성을 처벌하며, 모성 신화를 재생산해, 남성 가부장의 세계를 더 단단하게 했다. 독특하고 능동적인 여성 캐릭터로 시작한 비범한 힘은 결국, 거대한 '남성 가부장제'라는 벽에 막혀 사라지고 만다. '미씽'의 두 여자는 탈주를 시도했지만, 끝내 기존 시스템을 넘지 못했다. 이 영화는 재미있고, 완성도도 꽤 높은 스릴러이지만 절대로 좋은 여성 영화는 될 수 없을 것 같다. 이건 오히려 절망의 서사다. 
 
P.S. 역으로, 이런 절망의 서사가 감독의 의도였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이언희 감독은 남성 가부장제가 이미 존속하는 이 세계(영화든, 우리의 현실이든)에서 아무런 희망을 볼 수 없었다는 게 된다. 상상의 이야기에서조차 탈출구를 찾지도 기대하지도 못했다는 건, 더 슬프고 두려운 일이다. '미씽'은 절대 해피 엔딩일 수 없지만, 이게 감독이 의도하지 못했던 결과이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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