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리디아가 만나는 대한민국 최고예술가 100'은 오랜 문화예술계 및 방송 경력으로 다져진 그가 문화뉴스의 부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만들어진 특별한 코너다. 대한민국의 예술계를 이끌어온 아티스트들의 노고를 기리고 그들의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자 기획됐다. 어디에서도 쉽게 듣지 못하는 탑아티스트들의 진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박리디아는?] 

 
[문화뉴스] "나는 몸짓으로 무언가를 표현한 작품을 추구한다. 시대 속에 한 존재가 어떻게 살아가고, 살아남아야 하는지를 계속 보여주고 있었던 거다."
 
지난달 10일,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블랙리스트 페스티벌'에서 한 마임이스트가 장미꽃을 들고 퍼포먼스를 펼쳤다. 관객들의 박수를 받은 그 마임이스트는 "나는 이번 시국선언에 참여한 '뉴 블랙리스트'"라며,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다. 그래도 희망이 있는 게 지금을 잘 넘어서면 다시 우리가 정말로 살기 좋은 나라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지금 돌고 있는 힘을 온 국민이 가는 길로 가서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데 모아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공연 소감을 남겼다.
 
바로 '1세대 마임이스트' 유진규다. 유진규는 1968년 독일 마임이스트인 롤프 샤레의 내한공연을 관람한 후, 마임에 관심을 두게 됐다. 그리고 1970년 건국대 수의학과에 진학했으나, 1971년 극단 에저또(Ejotto)의 워크숍 참여를 통해 학교 공부 대신 마임이스트의 길을 걷게 됐다. 이후 1989년 소극장 공간사랑에서 한국마임페스티벌을 시작으로, 춘천마임축제를 한국의 대표 마임 축제이자, 세계적인 축제로 자리 잡는데 큰 공을 세웠다. 
 
"마임은 자신의 몸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을 표현하며, 재현하는 예술이라고 알고 있다. 결국, 시대나 상황 속에서 늘 자신의 몸이 있으므로, 그런 것들을 말이 아닌 몸짓이라는 이미지로 다녀가는 세계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마임의 매력 포인트를 전한 한국 마임의 산증인, 유진규 마임이스트를 만나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 11월 10일,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블랙리스트 페스티벌'에서 유진규 마임이스트가 장미꽃을 들고 퍼포먼스를 펼쳤다.
 
마임을 처음 하게 된 배경을 들려 달라.
ㄴ 내가 마임을 알게 된 건 고등학교 2학년 때니, 1960년대 후반이다. 마임은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서커스나 찰리 채플린과 같은 것은 일제강점기부터 있었다. 내가 처음 본 건 지금의 세종문화회관에서 한 현대마임 예술이었다. 어린 나이에 학생 할인권을 들고 찾아가서 봤다. 운명의 만남이었다. 보고 나서 정말 놀라웠다.
 
독일 마임이스트인 롤프 샤레가 큰 무대에 까만 타이츠를 입고 아무것도 없이 혼자 나와서 공연을 펼치는데, 하고 싶은 것을 다 했다. 도시, 자연, 밀림, 차를 타는 등 온갖 형태의 것을 다 보여주는 공연을 했다. 사람의 몸으로 별걸 다 표현하는데 감동이 있었다. 말을 한마디도 안 하는데, 어떻게 말로 하는 것보다 이야기를 더 재밌게 보여주나 싶었다. 그 충격이 오랫동안 머리에 있었다.
 
어려서 나는 '창경원 동물원' 근처에 살아서 동물과 사는 게 꿈이었다. 그래서 내가 가려는 길을 위해 건국대 수의학과에 들어가게 됐다. 꿈을 가지고 학교에 갔는데, 그때는 유신 직전이었다. 데모하고 그럴 때라, 학교가 군대 분위기였다. 이게 내가 생각한 대학이 아니었다. 고등학교까지 갇혀 지냈으니, 대학에 들어가면 자유가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이게 아니다 싶어 방황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게 연극동아리 '건대극장'이었다. 
 
연극반에서 연극을 하니까, 연극이 너무 재밌었다. 학교에 맨날 가는데, 수업은 안 듣고 연극만 했다. 그래서 교수가 학점을 간신히 주고 했다. 방황하다가 연극을 하자고 해서 마음을 먹었지만, 어떤 연극을 할까 고민했다. 사실주의 연극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특이한 연극을 하는 집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게 극단 '에저또'다. 우리가 할 말이 막히면 에, 저, 또를 한다. 말 중심의 연극이 아니라,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몸으로 표현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극단에 들어갔는데, 건대극장을 만드신 학교 선배인 방태수 대표가 있었다. 그 극단이 추구하는 게 지금 말하는 마임이었다. 말을 배제한 신체 표현을 추구했다. 어릴 때 마임을 본 기억과 충격이 돌고 돌아 연극과 만난 것이다. 그렇게 마임을 시작하게 됐다.
 
   
 
 
데뷔작은 어떤 내용이었나?
ㄴ 극단에 1971년 말에 들어가, 1972년에 첫 작품을 했는데, 윤조병 선생의 '건널목 삽화'다. 대사주의의 사실적인 연극이 아니라, 해체 작업을 통한 신체 작업이었다. 연기 수업을 통해 마임을 계속하게 됐고, 그러다 한국마임연구소를 발족했다. 그 당시 무세중 선생. 심우성 선생 등 몇 분이 한국 연극에 이러한 마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연극 표현의 다양성을 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표현의 자유를 억압받던 시기에 시대적 표현도 있었다.
 
1972년 한국마임연구소 발족 기념 공연으로 내가 한 작품이 '첫 야행'이다. 밤 '야'(夜)에 길 '행'(行) 자로, 김용락 작가, 방태수 연출님이 했다. 처음 도둑질하려고 나선 도둑의 이야기다. 도둑질을 하려고 벽을 밧줄로 타서 올라가고, 개를 만나서 당황도 하고, 유리를 잘라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다 도둑이 집 안에 들어가서 결국 주인에게 걸린다. 거꾸로 팬티까지 모두 빼앗기고, 발가벗은 채로 도망가는 것으로 끝난다. 시대적 풍자다. 마지막 장면은 도둑이 112에 신고하는 것이다. (웃음) 내가 오히려 털린 것이다. 그 작품이 마임 데뷔작이었다.
 
격동의 시기, 마임이라는 장르를 택했다. 마임과 사회, 마임과 역사는 어떻게 연관 지어질 수 있을까?
ㄴ 마임은 서양 사람들의 전통이다. 우리의 탈춤도 그랬듯이 여흥도 있고, 수많은 묘기와 곡예도 섞여 있다. 시대적 풍자는 그중 한 부분이다. 마임이 다 그렇다는 뜻은 아니다. 연극을 왜 하느냐는 마임을 왜 하느냐와 직결되는 문제다. 시기가 어찌 되었던 간에 수많은 사람을 재밌게 웃기고 묘기를 보여주는 어릿광대도 많이 있다. 그리고 내가 시대 속에서 뭘 해야하느냐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면서 표현을 하는 광대도 있다.
 
나는 광대적인 기질은 스스로 볼 때 없다. 마임도 고전적인 의미의 마임은 광대다. 찰리 채플린의 연장선에 있지만, 현대의 마임은 신체 표현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게 사회적일 수도, 개인적일 수도 있다. 나는 현대의 마임을 하는 후자다. 광대로의 마임이 아니라 몸짓으로 무언가를 표현한 작품을 추구한다. 시대 속에 한 존재가 어떻게 살아가고, 살아남아야 하는지를 계속 보여주고 있었던 거다.
 
   
▲ 박리디아 본지 부사장(왼쪽)이 유진규 마임이스트(오른쪽) 인터뷰를 하고 있다.
 
스토리텔링도 혼자 하지 않았는가?
ㄴ 내가 마임을 택한 이유가 그거다. 연극을 하는데 회의감이 왔다. 연극은 다 재밌고 좋은데, 너무 조직적이다. 분업화됐는데, 조직체계가 개인행동을 하는 순간 쉽게 말하면 '제재'가 들어온다. 실수하면 '빠따'도 맞기도했다. 이게 아닌데 하면서 결국 생각해보니 조직이었다. 나는 조직이 싫었지만, 연극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마임을 알게 되니, 혼자서 내가 생각한 것을 내 몸으로 다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하고자 한 것은 이게 아닌가 싶었다.

연극과 마임 사이에서 왜 마임을 선택했나?
ㄴ 사실 고민했다. 연극을 계속할까, 마임을 할까였다. 연극은 내 문제가 걸려있고, 마임은 아무도 하는 사람이 없는 게 문제였다. 나 홀로 깜깜한 길을 걸어야 했다. 주위 선배한테도 물어봤는데 반이 넘는 사람이 마임은 고생만 하고 누가 알아주냐, 연극해라였다. 연극도 웬만큼 했으니였는데, "아니다.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걸 해야지"라는 생각도 있었다. 내가 수의학을 그만두고, 연극을 할 때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택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마임으로 길을 정하게 됐다.

결국, 그 선택이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마임을 하게 된 원동력 같다. 그 시간 동안 어떤 작품이 가장 인상 깊었는가?
ㄴ 군대에 다녀와서 연극을 그만두고, 마임의 길을 가겠다고 한 게 1975년 무렵이다. 그때부터 내 이름을 걸고 공연했다. '유진규 무언극'이었다. 판토마임이 서양 이름이어서, 우리말 사전을 찾아보니 무언극이 있었다. 무언극으로 하고, 개인 발표회를 가져갔다. 내가 보여주고 싶은 세계와 나의 예술관, 표현방법인 '메소드'가 구축됐다.
 
   
 
1979년 공연한 '아름다운 사람'은 내가 쭉 실험해온 것의 총합을 모은 작품이다. 시대 속 존재의 이야기다. 1979년 12월에 공연했는데, 10월에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당했다. 그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내용이 확 바뀌었다. 타겟은 박정희 정권 압제 하에 있는 한 개인이었는데, 만들다가 그가 사라져버렸다.
 
압제 정권은 흔히 말하는 어둠이다. 깜깜함 속에서, 우리라는 존재는 빛을 잃지 말고 지키고 살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다 그가 사라지고, 빛이 확 들어왔다고 생각하니 또 거꾸로 안 보이는 것이었다. 거기서도 정신을 차리고 살아야 했다. 급변한 사회 시기에 문제를 제기했다.
 
미적으로 아름다운 게 아니라, 어떤 경우에서도 자기 존재를 지키며 살아남는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이다. 어떠한 경우든 그것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내용의 이야기다. 당시 공연은 신촌 76소극장에서 했는데, 옆이 골목길이고, 창문을 열면 바로 밖과 통한다. 극장 문을 열면, 바로 길이다.
 
(어떤 내용이었나?) 의사가 인체 인형을 들고나와, 메스로 배를 가른다. 그러면 선명한 빨간 장미꽃이 나온다. 그걸 빼내고 옆에 태엽을 감으면 움직이는 기계 로봇이 있다. 기계 로봇을 꿰매 넣으면, 안에서 태엽이 돌아가는 소리가 나온다. 우리 모습이 이렇지 않은가라는 내용이다.
 
여기에 하얀 종이를 깔아놓은 후, 살아있는 개미가 있는 병을 풀어놓으면 하얀 종이에 개미가 돌아다니게 했다. 그리고 질문을 준다. 돌아다니는 개미의 의미를 쓰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매직으로 막 쓴다. 어떤 사람은 보더니 책을 들고선 개미를 딱 때리고 죽여 버린다. 그게 자기 답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밖에 나가는 개미를 잡고 다시 들여보내기도 했다.
 
시대의 존재에 관해 물어본 마지막은 그것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공연 중에 유리창을 누군가 막 두들긴다. 소리가 나도 안 열어주니까 유리창을 깬다. 그 문을 부순 후에 빛이 확 들어온다. 그쪽에서 생닭이 날아 들어온다. 수탉인데, 닭은 난데없이 날아 들어오니 "이게 뭐야"하고 두리번두리번한다. 닭도, 사람도, 관객도, 나도 다 놀란다. 그러면서 극장 문이 열린다. 주변 사람들도 뭔 난리야 하고 기웃거리고, 동네 애들도 다 들어온다.
 
첫 공연도 다 그렇지만 매일 공연을 하니까 주변 사람들이 알아서 '또 닭이야'라고 한다. 나는 그 자리를 빠져나오면서 작품은 끝나게 된다. 그때 내가 추구하고자 한 공연의 방법은 무엇이었냐면, 대개 공연은 짜인 것을 수없이 반복한다. 어떤 공간에서든 똑같은 공연을 수없이 반복하는데, 이것은 공연이 아니라고 봤다. 시간과 공간에 따라 계속 바뀌고 살아있는 무언가라고 봤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든 짜인 것을 반복하는, 그런 것에서 벗어나는 표현을 추구했다.
 
   
▲ 유진규의 '빨간방' 포스터.
 
본인이 좋아했던 다른 작품들도 소개해 달라. 
ㄴ 1998년에 공연한 '빈손'도 있다. 지금은 완치가 됐지만, 뇌종양 판정을 받은 후, 모든 것에 손을 놓고 산속에 들어가 8개월간 지낸 적이 있다. 그 이후 '빈손'을 만들게 됐다. '아름다운 사람'과 다르게 '빈손'은 우리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말도 있지만, 우리가 빈손일 때 비로소 다른 것을 잡을 수 있다. 빈손일 때,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는 이야기를 보여준다. 한 손으로 컵을 잡고 있으면, 다른 것을 잡지 못한다. 빈손이어야 다른 것을 잡을 수 있다.
 
또한, 2008년 '빨간방'이 있다. 설치 공연이다. 기존의 공연 개념을 완전히 바꾼 것이다.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보는 새로운 형태의 마임이다. '빨간방'이라는 공간 안에 들어가면, 빨간색 반짝이 술로 가득 차 있다. 헤치고 들어가면, 관객들은 이리 갈까, 저리 갈까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가다 보면 다시 돌아 나와야 하는 상황에서, 관객들은 점점 불안해하기 시작한다. 깊이 들어갈수록 길을 찾아 나갈 수 있겠느냐는 의미로 작품을 구성하고자 했다.

'빨간방'은 특별한 방식인데, 이러한 작품을 만들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ㄴ 내 퍼포먼스는 극적인 구조를 가진다. 그러나 펼쳐지는 방식은 연극과 같이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짜인 틀이지만, 관객 속에 던져놓자는 것이었다. 내가 연극을 왜 하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간다. 사람들에게 즐겁게 보여주거나, 삶의 의미를 전달해 주는 게 아니다. 관객에게 네 존재가 뭐냐는 질문을 던져서, 관객 스스로 자각하게 해주는 게 내가 하려는 공연의 목적이다. 스스로 돌아보고 자각하게 만드는 게 내가 마임을 하는 이유다.
 
어떤 방법으로 가능하겠는가? 짜인 것을 반복하는 순간 관객은 알아챈다. 가상현실이라는 것을 알아채기 때문에, 객석에 앉아있는 몸을 불안전한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이게 실제 현실이라는 것을 보여줄 때야 관객이 자각한다. 내가 왜 여기에 있지, 난 어떻게 해야 하지를 스스로 판단하게 된다. 다분히 불안하고 위협적일 때, 그 효과가 더 커진다. 작품의 끝은 결국 질문이다. 그 질문을 안고 가게 한다. 
 
   
▲ 유진규 마임이스트가 2016 한국마임 개막작 공연으로 작품 '꽃'을 선보이고 있다.
 
1989년 춘천마임축제를 시작했고, 올해 30년 가까이 됐다. 왜 춘천이었나?
ㄴ 과거 이야기를 해야 한다. 1981년 내가 춘천으로 가면서 마임계를 잠시 떠났다. 군사독재와 폭압 정치를 하는 전두환 정권 시기였다. 주변 친구도 잡혀갔다. 실제로 그들처럼 싸우지 못하고 있는 게, 너무나 괴로웠다. 정말로 시골에 조용한데 가서 숨어 사는 게 제일 낫겠다고 생각했다. 행동도 못하고 서울에서 계속 사는 건 스스로 견디기 힘들었다. 그때 마침 1981년 3월에 결혼도 했다. 결혼하면서 새로운 삶을 살자고 생각했다. 춘천의 도시 이미지가 좋았다. 당시에 춘성군 삼포마을은 마을에 집도 몇 채 안 될 때였다. 뭐하면서 시골에서 먹고 살까 했다.
 
농사를 지을까 하다가 체질에 맞지 않았다. 내가 수의학과 출신이니 동물을 키우면서 살면 좋을 것 같아 소를 키웠다. 그러다가 1987년에 서울에 있을 당시 내 공연을 기획해주던 친구 신영철이 찾아 왔다. 친구가 "한국 마임이 지금 완전히 위기다"며 "다 떠나고 하는 사람이 없다. 후배들 몇 명 있긴 해도, 이대로 가면 맥이 끊어지겠다. 유명무실한 상황에서 네가 한 번 나와 힘을 모아줘야 하지 않겠냐"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생각 없어. 마임과 떠났다"라고 답했다. 그러다 친구는 이 한마디를 하고 떠났다. "네가 1세대 아닌가. 너보고 시작한 후배들이 있는데, 네가 그러고 있으면 안 된다."
 
그러고 나가는데 '내가 책임을 져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확 들었다. 고민했다. 작품을 준비하고 있었다면, 바로 했을 텐데 그렇지도 않았다. 그래서 반은 내가 전에 했던 작품을 하고, 지금부터 작품을 만들어서 날을 잡아 딱 한 번 만 하자고 했다. 그게 1988년 올림픽 때다. 공연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매스컴이 유진규가 다시 마임으로 복귀했다고 했다. 그 친구가 보도자료를 잘 써줬나 보다. 마임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세종문화회관 별관에서 공연했더니, 마임 하는 애들이 다 보였다. 김성구, 김동수, 유홍영 등 동기나 후배, 친구들 다 모였다. 술자리가 벌어졌는데, 배우 기국서도 당시 마임에 관심 있다고 해서 오게 됐다. 다들 모여서 영차영차 하고 이야기를 했는데, 그게 그렇게 끝나겠는가? 모이니까 힘이 있다는 게 보였으니, 한 번만 하고 발을 빼기가 쉽지 않았다. 내가 모여놓게 하고 발을 빼면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금만 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그러면 정기적으로 모여서, 이참에 마임을 살려보자. 마임을 다시 한번 일으켜보자"고 해서 소극장 공간사랑에서 매달 한 번씩 돌아가면서 작품을 발표하고자 했다. 결국, 1989년 공간사랑에서 한국마임페스티벌을 친구 신영철이 기획하고 나는 도와주게 되면서 시작했다. 그 당시엔 우리가 마임 분야라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끌어모았다. 기국서, 무세중 등을 비롯해 탈춤, 무용, 퍼포먼스 등 움직임 분야에서 하는 사람들을 다 불러들였다.
 
한 1주일을 했다. 잘 끝났는데, 뒤이어서 밀려 들어온 게 마임의 정체성이었다. 도대체 마임이 뭐야라는 역공이 들어왔다. 마임을 살리려고 하니, 잡동사니가 됐다. 그래서 방향을 정해야 했다. 정체성이 없는 잡동사니 집단이 될 것 같아 마임이라 할 수 있는 것만 딱 모으자고 해서 한국마임협의회를 만들었다.
 
춘천은 1989년에 한국마임페스티벌에서 몇 작품만 모아서 공연했다. 거기서도 뒤풀이를 했는데, 내 주변에 춘천에서 마임을 해보자는 의견도 나왔다. 서울과 춘천의 장단점을 고려했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음악제, 연극제, 무용제 등이 모두 서울에서 하는데, 서울에서 5명밖에 안 하는 마임 축제가 티가 날까라고 생각했다. 춘천은 아무것도 없지만, 마임을 한다는 순간 춘천에서 하는 유일한 것이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용의 꼬리가 되느냐, 닭의 머리가 되느냐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때 결정적인 것이 있었다. 우리가 하려는 게 공연예술축제인데, 세계적으로 유명한 축제가 아비뇽 페스티벌과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 칸 영화제 등이다. 다 보니까 대도시가 아니었다. 아비뇽, 칸을 보면 인구가 몇만 밖에 되지 않는 작은 도시인데, 세계적인 공연·영화 예술제를 다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어떻게 세계적인 축제가 됐나 해서 봤더니, 그 도시에 씨앗을 뿌려 같이 한 것이 주요했다. 대도시는 너무 큰 게 많으니, 중심이 없다. 이것도 저것도 다 중요하다. 아무것도 없는 춘천에 마임의 씨를 뿌려 마임의 도시로 만드는 게 바르다고 생각해 하게 됐다.
 
   
 
 
이렇게 마임의 씨를 춘천에 뿌렸고, 현재에 왔다. 앞으로 마임이 계속 유지되고, 예술적 장르로 자리를 잡아가야 하는 시점이 아닌가 싶다. 마임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는가?
ㄴ 얼마 전 한국마임이 끝났다. 연례행사로 하는데, 문제가 많다고 봤다. 이유의 핵심은 정체성이다. 과연 스스로 마임이 무엇이며, 이 시대의 마임은 또 무엇이며, 한국 공연예술계에서 마임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많이 부족하지 않나 싶다. 그러니까 예술적인 측면에서 보면 작품다운 작품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건 치명적인 거다. 이 문제를 어떻게 넘어서야 하는가가 있다.
 
사실 방법은 여러 가지다. 얼마 전에 이 문제 때문에 회의도 한 거로 안다. 내가 생각할 때, 스스로 정리를 좀 해야 하지 않나 싶다. 이 마임이 처한 상황이나 위기에 대해 공감을 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흐름을 다시 짜야 하지 않겠나 싶다. 지금 한국마임협의회 회원이 50명인데, 50명의 의견만 다 들어서 수렴한다는 것은 똑같이 지금 하고 있는 한국마임 형태를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
 
뚜렷하게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 활동하는 마임예술가들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런데 이들이 한국마임 페스티벌이나 한국마임의 문제점을 외면하고 있다. 이걸 넘어가는 방법은 다시 진지하게 원점에서 한국마임을 다시 살리기 위해, 어떤 방법과 길이 필요한가에 대한 고민을 하는 것이 시작이라 본다.

앞으로 어떤 활동을 하고 싶나?
ㄴ 나는 사실 그동안 춘천마임축제 준비도 하느라 공연 활동을 멀리한 게 사실이다. 본격적으로 지난해부터 공연예술가로 활동을 재개했다. 어차피 나는 배우니까 정형화된 무대보다, 자연이든, 거리든, 시장이든, 주어진 내가 원하는 공간에서 살아있는 공연을 하고 싶다.

▲ 유진규 마임이스트가 본지 독자에게 인사말을 남기고 있다.

 

[글] 문화뉴스 박리디아 (Lydia Park)_본지 부사장 golydia@mhns.co.kr
[사진·영상] 문화뉴스 양미르 기자 mir@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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