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김상윤

[문화뉴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수면 위로 떠오른 지 한 달이 지났지만, 변화한 게 없는 이 시점에 본지에선 '우리 모두가 블랙리스트 문화예술가다'라는 섹션을 연재한다. 매일 다양한 문화예술인들의 의견을 듣는 자유 발언대를 마련했다. 그 자유발언의 분량과 형태는 자유롭게 이어질 예정이다.


서른 한 번째 순서는 문화기획자로 활동 중인 김상윤이다. 그는 최근 예술가 검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등 일련의 사건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맞서기 위해 7,449명의 문화예술인과 289개 문화예술단체가 참여한 '우리 모두가 블랙리스트다'에 서명했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자진해서 이름을 올렸다. 이유는?
ㄴ 저는 여러 문화와 예술 영역을 오가는 문화기획자이고, 그러다 보니 '예술가 블랙리스트'에는 기본적으로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예술가에 대한 분류를 장르별 분류로 하기 때문이지요. 리스트의 개개인 이름 뒤에 괄호로 (장르)가 표기된 걸 보셨을 겁니다. 제 이름은 있는데 뒤의 장르가 저랑 맞지 않더군요. 다른 분이었어요. 아마 씨네21 김상윤 대표님이신 것 같습니다. 우선 여기에 (또) 화가 났습니다. 
 
우선, 블랙리스트 사건에 분노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선 블랙리스트는 그 자체로 차별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 리스트의 목적에 따라 리스트에 들어있는 사람은 소외되지요. 한국의 문화적 지형에서 정부 정책사업에서 소외된다는 것은, 특정한 몇몇 장르를 제외하면 먹고사는 문제에 직접 연결됩니다. 이 리스트에 들었다는 것은, 작가로서의 활동뿐만 아니라 생활인으로서의 생존까지도 제약받게 된다는 의미도 됩니다. 
 
이 리스트 때문에 힘들었다는 사람들도 많지만, 사실 더 넓게 생각해보면 이 리스트의 존재는 매우 편리한 것이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말하는 '그런 나쁜 사람'을 지원했다가 나중에 큰 화를 입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해 주는 공무원들의 무사안일주의와 박근혜 대통령을 비판하거나, 비꼬거나, 비하하는 작품을 정부에서 지원했다는 지지자들의 항의에 이어지는 '위'에서의 '상황 파악'을 쉽게 피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이 리스트는 여러 의미에서 '예방약'의 역할을 했습니다. 무엇보다, 이 리스트를 들고 있음으로써, 만약 걸러내지 못한 어떤 작가가 '사고'를 쳤을 때도, '저희는 이 리스트에 충실했어요'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신종 면죄부인 셈이지요. 
 
제 생각이지만, 이 블랙리스트는 문화예술영역에서 박근혜 정권에 대한 문화적 분노를 나타내는 사람들을 '잡아내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들의 사익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 리스트는 자신들이 저지른 불법적이고 탈법적인 사익추구행위에 대해 반대하고, 문화예술의 힘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어, 앞으로 자신에게 반대할 수 있는 '빨갱이들'을 '만들어 낼 가능성'을 차단하는 리스트이기도 합니다.
 
박근혜 정권은 문화예술 영역 외에도 거의 모든 영역에서 이러한 블랙리스트를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작동시켰습니다. 단지, 문화예술영역은 영역과 수가 많고, 관리가 더욱 어려웠으므로 리스트가 구체적으로 필요했을 뿐이겠지요. 
 
현재 시국이나 문화예술계 현 상황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가감 없이 이야기해달라.
ㄴ 사실, 박근혜 정권 이전에도, 그 이전에도 이런 블랙리스트는 사실 이전에도 다른 형태로 존재해왔다고 생각합니다. 이전에는 조금 더 은근한, 구체적으로 문제라고 대응하기는 어려운 의뭉스러운 방식이었을 뿐입니다. 예술계의 각 영역에서 특정한 성향에 있는 사람이 높은 지위를 얻게 되면 다른 성향의 사람들을 배척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지요. 요즘 뉴스를 보면서 익숙해진 말로 하면 '줄 세우기'와 '코드 인사'쯤 될까요. 이전 정권에서든, 그 이전 정권에서든 '패거리' 문화는 존재해왔습니다. 
 
문화예술계는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해 분노하고 있고 이는 매우 당연한 일이지만,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먼저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문화예술계는 아주 일부의 상업적 문화상품을 제외하고는 자생성을 획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지 이번 정권, 지난 정권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문화정책의 지속적 실패의 결과이자, 이 실패 사이에서 정책의 변화에 따라 부화뇌동하던 문화예술계 안일함의 결합 역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창조경제' 운운하는 말을 듣고 문화예술계 내에서 그게 실제로 가능한 개념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을까요? 저 역시 많은 사람과 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고, 몇 가지의 결론은 반복되었습니다. 하나는 "뭔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다"이고, 다른 하나는 "그래서 뭐 나름대로 해 쳐먹나 보지.",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였습니다. 저도 분명한 방조자였습니다. 
 
우리의 문화예술계는 정부의 문화정책에 따라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있습니다. 문화예술에 대한 기초연구 자체가 부족하고, 실질적인 국가의 예술정책도 기본적으로 파편적으로 구성됩니다. 향유자 중심으로 문화와 예술 보급의 가치를 중시하며 시장을 성장시킬 가능성을 닫아놓고, 다른 쪽에서는 예술가의 가치의 문제를 시장에서 해결할 방법을 찾기보다 생존의 문제로 재구성하여 예술가들을 '정부 돈을 뜯어먹는 가난뱅이들'로 만들었습니다.
 
시장성이 있는 문화예술영역은 거의 전부 대기업의 몫이 되어버렸고, 예술가들은 산업예비군처럼 기능합니다. 이렇게, 문화와 예술의 자생성이 존재하기 어렵게 잘게 쪼개 놓은 상황에서 앞으로는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을까요?
 
그러기 위해서, 새로운 재단이나 위원회, 지원센터가 생기고 없어지고 당장 지원금이 나오고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한 나라의 문화와 예술이 어떻게 그 나라와 조응하는지에 대한 원론적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가장 취약하고 만만하므로, 그리고 우리와 모든 국민이 문화예술영역에 대한 이해가 너무 부족했기 때문에, 그들은 아주 쉽게 전횡을 기획했고, 그것이 실제로 작동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결론적으로, 박근혜 정권의 전횡에 대한 문제 제기보다 더 시급한 문제는 문화예술에 대한 국정운영 전략부터 과거의 것에 단어 몇 개만 바꾸고, 네 글자로 이루어진 그럴듯한 캐치프레이즈 하나만 붙여 써먹던 안일함에 대한 비판과 반성에서 시작하여야 합니다. 문화예술정책 전체에 대한 국가적 원칙이 아니라 정권의 전략에 따라 문화정책의 원칙이 없어, 결과적으로 도태되고 있었음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실체 없는 그럴듯한 말장난에, 패거리 문화에, '문화예술의 가치'와 같은, 실질적으로 먹고 사는 데는 도움도 안 되는 미사여구에 취해 실질적인 문화예술계의 자생성을 기반으로 하는 건강함은 거의 모두 사라졌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여기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바탕에서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에 대한, 아주 길고 느린 논의가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화뉴스 양미르 기자 mir@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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