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베르토 쥬코'를 연기한 백석광 배우가 8일 오후 국립극단 스튜디오 하나에서 연습 시연을 하고 있다.

[문화뉴스] "35년 전 유럽 전역을 충격에 빠뜨린 이탈리아의 연쇄 살인마 '로베르토 쥬코'가 각종 범죄가 만연한 2016년 대한민국에 나타났다."

 
국립극단이 소개한 연극 '로베르토 쥬코'의 작품 설명문 중 일부다. '로베르토 쥬코'는 대표적 현대 프랑스 연극 레퍼토리 중 하나다. 세상의 모든 폭력이 스며들어 있는 작품이라 인정받으며, 현대사회의 타락, 모순, 자본주의에 토대한 난폭한 인간관계, 가족관계의 분열, 소통의 부재 등을 고발하고자 한다.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한 탓에 프랑스 일부 지역에선 초창기 몇 년간 공연이 금지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에서 일어나는 테러, 폭력, 맹목적 살인을 현상적으로 다루기보다 근저에 자리 잡은 인간의 폭력과 악을 근원적으로 다뤄 현대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단순히 살인의 상황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살인자와 피살자 사이의 관계, 군중 속에서의 독백을 통한 인간관계의 단절을 보여주며 비극적 영웅의 보편적 모습을 담았다.
 
작품을 쓴 베르나르-마리 콜테스 작가는 1988년 이 작품을 유작으로 남겼다. 1990년 베를린 샤우뷔네 극장에서 페터 슈타인의 연출로 독일어로 초연됐다. 그리고 한국에선 2002년 7월 극단 76단의 기국서 연출로 초연됐다. 긴 독백과 시적인 언어로 공연될 때마다 배우들에겐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23일부터 10월 16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2015-16 한·불 상호교류의 해 공식인증사업으로 진행되는 이번 공연의 연습 공개가 8일 오후 서울시 용산구 청파로에 있는 국립극단 스튜디오 하나에서 열렸다. 1장부터 3장까지 연습 시연 공개 후 기자간담회엔 김윤철 국립극단 예술감독을 비롯해 로랑조 말라게라, 장 랑베르-빌드 연출, '로베르토 쥬코' 역의 백석광 배우가 참석했다.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작품을 미리 살펴본다.
 
   
▲ 김윤철 국립극단 예술감독이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2002년 국내 초연 후 몇 차례의 공연이 있었다. 국립극단에서 '로베르토 쥬코'를 하게 된 배경과 두 연출가를 초청한 이유는?
ㄴ 김윤철 : '로베르토 쥬코'는 배우 중심, 서사 중심, 현대적 미학 중심이라는 우리 극단의 방향성과 가장 잘 맞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이 쓰인 1980년대만 하더라도, 이 작품은 사실주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부조리적인 미학이며, 주인공의 동기가 없는 살인 등은 사실주의를 초월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오늘날 악과 폭력이 선과 평화를 압도하는 시대를 살면서, 우리는 이 작품처럼 불안한 삶을 살고 있다. '로베르토 쥬코'는 현대에 와서 사실주의적인 작품이 된 것이다. 현대 사회를 들여다봐야 하는 국립극단 관점에서 시의 충만한 작품이라 생각했다.
 
동기가 없는 캐릭터의 성격, 논리가 없이 사건이 전개되는 이 극은 현대를 가장 잘 반영한다고 본다. 작가인 베르나르-마리 콜테스의 작품은 내가 기억하기론 4편 정도가 끊임없이 공연되는데,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우리가 콜테스의 작품을 추상적으로 접근해왔기 때문 같다. 추상적 접근은 관객과 소통에서 어려움을 만들어 낸다. 
 
콜테스 뿐 아니라 서양의 고전을 다룰 때, 한국연극은 대체로 추상적이고 일반적으로 접근한 게 보통이었다. 이번에 장 랑베르-빌드와 로랑조 말라게라 공동연출을 모신 이유는 추상적인 연극이라 하더라도, 굉장히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연출에 접근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너무 추상적이고, 철학적이고, 깊이 있게 접근하려고 하면서 정작 놓쳐버리는 텍스트의 힘, 연극성, 시의성, 현실성을 두 분을 통해서 체험해보려 한다.
 
장과 로랑조는 공동연출을 하면서 특이한 연출을 해왔다. 장은 프랑스 사람이지만 상당히 프랑스적이지 않은 연극 미학인 단순하지만 강렬한 연극을 만들어왔고, 로랑조는 섬세함을 잘 다루면서 연극적인 모호함을 보여준다. 둘이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상호보완적으로 잘 어울린다. 그래서 두 분을 초대해서 발견하지 못한 서양 현대고전의 진정한 시의성을 찾아보자는 생각을 가졌다.
 
   
▲ 로랑조 말라게라 연출이 인사말을 남기고 있다.
 
한국에서 작품을 연출하게 된 소감을 들려 달라.
ㄴ 로랑조 말라게라 : 20년 전부터 연극 연출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스위스 크로슈탕 극장의 예술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장과 나는 배우로 활동하면서 알게 됐다. 배우로 연출하면서, 연기로 연출 접근하려는 방법이 비슷했다. 그런 방법으로 한국 배우들과 연출을 하게 됐다.
 
'로베르토 쥬코'는 어려운 작품이다. 연극의 수많은 '다른 요소'들을 한 작품에 모아놨기 때문이다. 15장이라는 각 장의 성격을 정의하는 것이 연출하면서 가장 힘든 부분이었다. 어떤 장은 현실적이고, 초현실적이기도 하다. 어떤 장은 비극적이면서, 어떤 장은 비극적이기도 하다. 오늘 시연한 1~3장을 보더라도 각 장의 성격들이 극명하게 다르다.
 
콜테스는 매우 다른 요소를 한 번에 조화하는 성격이 있다. 예를 들면, 셰익스피어 연극, 쿵후 영화, 마리보의 연극이 있다. 콜테스는 '로베르트 쥬코'를 만들면서 본인이 좋아한 모든 요소를 섞었다. 세상을 표현하는 한 작품은 그렇게 탄생했다. 결과적으로 15장은 지금 현재 일어나는 세상사와 닮아있다. 현재 세상은 어울리지 않고, 연결이 없이 한꺼번에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장 랑베르-빌드 : 김윤철 예술감독이 소개한 것처럼, 나는 프랑스 사람이지만 프랑스적이지 않다. 프랑스 리무쟁 국립연극센터 예술감독으로 있으면서, 프랑스 최고수준의 연극학교인 리무쟁 국립고등연극학교 교장을 맡고 있다. 나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열정을 가진 사람이다. 배우이기도 하고, 무대연출가이기도 하다. 배우를 지도하는 위치에도 있지만, '화이트 광대'를 연기하며 내 열정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 장 랑베르-빌드 연출이 작품 연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어떻게 두 연출가가 공동 연출을 하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많다. 먼저 정신적으로 이러한 연극은 혼자 연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연극이라는 자체가 수많은 대화가 오가는 가운데, 그 대화 속에 해답을 찾아가는 것으로 생각한다. 약 한 세기 전부터 생겨난 연출가라는 직업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서로 의논하면서, 궁극적으로 이 작품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로랑조와 하는 작업은 좋은 관계 속에서 진행된다. 내가 시를 쓰는 시인이어서 은유적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걸을 땐 발이 두 개 필요하다. 하나로만 걸으면 절름발이가 될 수 있다. 그 한 발이 로랑조다. 나는 두 발로 똑바로 걷고 싶어서, 계속 로랑조와 함께 할 것이다.
 
김윤철 예술감독의 초청으로 작품을 해서 만족한다. 내가 연출할 때 자주 공연을 보셔서, 수차례 내 스타일을 확인했기 때문에 초청했다고 생각한다. 지금 이 세상에선 연극적인 요소가 많이 사라져가고 있다. 연극의 중요성에 대해 상실감이 느껴지는 시대다. 김윤철 예술감독 덕분에 연극성을 많이 찾아가려 한다. 6년 정도 김윤철 예술감독과 알고 지내는 것 같다. 김윤철 예술감독 덕분에 한국의 전통놀이인 판소리에 대해 알게 됐고, 지금은 판소리의 열광적인 팬이 됐다.
 
로랑조가 설명한 작품 이야기에 대부분 동의한다. 이 작품을 선택한 것은 오늘날 일어난 사회 현상의 모든 것을 다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배우들과의 작업은 너무나 환상적이었다. 국립극단 단원 자체의 연기가 매우 환상적이었다. 물론 배우들 능력 자체가 탁월하기도 하지만, 연극 이해도 역시 탁월했다.
 
   
▲ 연극 '로베르토 쥬코'의 1장 연습 시연이 진행됐다.
 
배우들이 인텔리전트하며, 열정적이다. 같이 작업하는 자체가 유쾌했다. 이렇게 한국 배우들과의 작업 자체가 서로 연극에 대해 느끼는 것을 교환할 계기가 된다고 본다. 로랑조와 나는 연극을 완성하는 게 아니라, 배우들과 함께 서로 의논하며 연극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김윤철 예술감독과 미래 연극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의논을 했던 적이 있다.
 
로렌조와 나는 복잡한 연극이나 세상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협력하는 것이라 본다. 김윤철 예술감독과의 대화를 나누고 난 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은 '신이 한 명 있는 것보다 여러 명 있는 게 좋다'다. 이 모든 생각을 가능케 해주신 김윤철 예술감독께 감사드린다. 작업하면서 믿음을 보여준 국립극단 스태프와 배우들에게 감사드린다.
 
'로베르토 쥬코'를 연기한 소감은?
ㄴ 백석광 : 대학교 때 작품을 읽었을 때 캐릭터의 어두움과 강렬함에 매력을 느꼈다. 연출님과 이번 기회에 작업하니 보다 더 복잡하고 다층적인 현대인의 모순이 숨겨져 있다고 느꼈다. '로베르토 쥬코' 캐릭터에 애착을 느꼈고, 연기하면서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아직 '로베르토 쥬코'가 이런 사람이라고 말씀드리긴 어렵다. 연습하면서 계속 찾아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연출님은 "'로베르토 쥬코'가 우리가 알고 있는 선함과 세상을 판단하는 잣대를 잠시 미뤄두고 이 세상에 고정된 것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하나의 바이러스"라고 말씀 주셨다. 그래서 연출님 말씀에 동의하고, '로베르토 쥬코'라는 바이러스가 카멜레온처럼 인격을 바꿔나가면서 생존을 하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마지막엔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 고전 작품의 좋은 사람, 나쁜 사람 개념이 아닌 현대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 백석광 배우가 작품에 출연한 소감을 남기고 있다.
 
김윤철 예술감독은 서양 고전을 추상적, 철학적으로 접근하면서 놓치는 텍스트의 현실성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이 어려운 숙제를 풀기 위한 연출방향은 무엇인가?
ㄴ 장 랑베르-빌드 : 한국 연출이라고 해서 유럽 연출보다 더 놓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반대로 유럽 연출도 이 작품의 텍스트를 많이 놓칠 수 있다고 본다. 이 작품은 콜테스라는 작가가 에이즈에 걸려서 죽음을 기다리며 쓴 마지막 작품이다.
 
연극에 대한 모든 지식을 이 작품에 쏟아부었다. 그 해답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연출하면서 찾아가고 있다. 무대장치와 같은 조그마한 부분까지 서로 질문을 통해 찾아가고 있다. 아직 이해가 되지 않았던 부분은 배우들이 어떻게 표현하는지, 연기로 보여주면서 찾아가는 일도 있다.
 
로랑조 : 그렇게까지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은 아니라고 본다. 이미 썩어가고 있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쥬코'라는 타락한 인물을 더 타락하도록 만들어간다. '쥬코'를 바이러스에 비유하자면, 바이러스라는 무생물은 세상을 오염시키며 세상을 죽여버린다. 단순한 법칙 하나로 이 작품을 읽는다면, 오히려 희망차게 더 작품이 밝게 보일 수도 있다. 부조리와 굉장히 먼 작품으로 해석하고 있다.

무대와 의상을 장 랑베르-빌드 연출이 맡았다. 특히 무대는 지난해 연출이 방문한 서대문 형무소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들었다. 무대 장치가 주는 의미는?
ㄴ 김윤철 : 무대에 7개의 방문이 있다. 작품의 구체적인 생활 환경이면서 메타포다. 이 문은 열림을 위해 존재하는가, 닫힘을 위해 존재하냐는 콘셉트가 있다. 그중 현대인의 소외, 소통의 부재를 이야기하기 위해 닫힘을 더 중시한다. 이러한 표현들이 내가 말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접근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 연극 '로베르토 쥬코'의 3장 연습이 펼쳐졌다.
 
장 랑베르-빌드 : 무대 디자이너로 작업할 때, 아이디어는 가만히 있다가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로랑조와 작품에 대해 서로 의견을 교환한다. 운이 좋게 프랑스 유명 디자이너에게 무대디자인을 배울 수 있었다. 그분에게 배운 것을 일상생활 속에서 로랑조와 이야기하면서 무대장치를 생각할 수 있게 됐다. 무대장치는 배우들이 연기하기에 적절해야 하고, 배우와 파트너여야만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배우라고 할 수 있다.
 
무대장치만으로도 굉장히 중요한 작품의 의문점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작품을 준비하면서 무대장치가 중요했고, 이렇게까지 완성되지 못할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 15장이 나오는데, 실내와 실외가 계속해서 바뀌기 때문에, 그것을 다 보여줄 수 있는 무대장치를 찾는 게 힘들었다. 어쩌면 그것이 콜테스 작가가 의도한 것일 수도 있다. 무대가 존재할 수 없는 연극작품인 것이다.
 
예를 들어, 1장에서 2~3분 동안 감옥 장면인데 암전이 되어서 2장은 한 집안의 실내가 되어야 한다. 그걸 해결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두 번째로 문제 된 것은 김윤철 예술감독과 더 이야기를 나눠봐야 알겠지만, 앞으로 프랑스, 스위스 등 유럽 투어공연을 위해 어떻게 무대 장치를 만들어야 할지 고민했다. 이 무대 장치는 유럽에서 이야기하면서 사용할 때도 생겨날 수 있는 문제였다. 다시 말해 무대장치가 이야기하는 바도 명확해야 하지만, 이동할 수 있어야 했다.
 
배우와 호흡을 하면서 연기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무대장치가 있는 상태로 배우들이 연습하니 연기가 더 좋아진 것 같다. 무대장치라는 배우는 배우들이 가진 에너지보다 낮지도 높지도 않아야 한다.
 
   
▲ 두 연출의 호흡도 작품의 관극 포인트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 해결책을 로랑조와 찾아가는데, 보통 해결책을 찾기 위해 같이 걷기나, 등산하면서 이야기를 한다. 관광하는 게 아니라 작업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현장에서 사진도 찍어가며 영감을 가져간다. 연극을 하기로 한 후, 문이라는 아이디어를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하던 중에 우연히 서대문 형무소를 방문했고, 이에 착안해 무대장치를 만들게 됐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ㄴ 백석광 : 연출님과 이야기하는데, 캐릭터에 대한 훌륭한 해석을 하고 오셨다. 대화를 나누면서 어려운 부분을 만났을 때, 두 분의 의견 차이가 나올 때가 있다. 그때 서로 고민하며, 이야기 나누고, 토론도 하면서 연극을 만들 수 있었다. 이렇게 수평적이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무겁고 어둡지만, 때론 재미난 이 작품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었던 것 같다.
 
문화뉴스 양미르 기자 mir@mhns.co.kr

주요기사
관련기사

 
저작권자 © 문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