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 극단 노을의 게오르크 뷔히너 작 오세곤 재구성 연출 보이첵

 

[글] 문화뉴스 박정기 (한국희곡창작워크숍 대표)
pjg5134@mhns.co.kr 한국을 대표하는 관록의 공연평론가이자 극작가·연출가.

[문화뉴스] 게오르크 뷔히너 (Georg Büchner)는 24세에 요절한 천재적인 작가다. 그는 독일에서 1813년에 태어나고 1837년에 스위스에서 사망했다.

뷔히너는 소싯적부터 글쓰기는 재주가 있었다. 1823년 3월 학교 축제일에 <과일을 먹을 때 주의하세요! (Vorsicht bei Genusse des Ebstes!)>라는 라틴어로 글을 처음으로 공식석상에서 낭독발표하고, 1830년 9월에는 자신이 다니던 김나지움의 공식 축제에 <카토에 관한 연설, 자살 옹호론(Rede über Cato>을 발표했고, 1831년 김나지움의 졸업식에서 <메네니우스 아그리파 (Menenius Agrippa)>라는 이름으로 산상에 모인 민중들이 로마로 돌아갈 것을 권유하는 글을 라틴어로 발표했다.

다름슈타트에서 김나지움을 마친 그는 1831년부터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의 의학부에서 의학과 자연과학 공부를 시작했다. 이 시절에 그는 자신이 세를 들어 살던 집 주인(목사)의 딸인 빌헬미네 얘글레 Wilhelmine(Minna) Jaegle와 비밀리에 약혼을 했다. 슈트라스부르크에서 2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그는 1833년에는 다시 독일로 돌아와 기센대학에서 의학공부를 계속했는데, 이때 그는 역사와 철학도 아울러 공부했으며, 한편으로 정치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즉 그는 1834년에 인권협회를 창설하고, 헤센의 자유주의자들과 함께 헤센 대공국의 반동적 사회 상황에 저항했다. 1834년 7월에 뷔히너는 부츠바하 출신의 학교장 바이디히 (F. L. Weidig)와 함께 '헤센급전'이라는 독일 최초의 사회주의적 성향을 띤 전단을 작성하여 농민들에게 살포해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 후 그는 기센을 떠나 다름슈타트에 있는 부모의 집에 숨어살면서 체포된 동료들의 구출작업에도 힘을 쏟았다.

이 무렵인 1835년 2월에 그는 첫 희곡 <당통의 죽음 (Dantons Tod)>을 썼다. 그러나 같은 해 3월에 경찰로부터 소환장을 받은 후 독일에서 프랑스 국경을 넘어 슈트라스부르크로 도망한다. 6월에는 뷔히너에 대한 공개수배로 더 이상 고국 땅을 밟을 수 없게 되지만, 7월말에 출판사의 편집위원으로 일하던 구츠코 Gutzkow의 도움으로 <당통의 죽음>이 독일에서 출판된다.

동년 5월에 중편소설 <렌츠 (Lenz)>를 집필해 9월에 완성하고, 10월에는 빅톨 유고 (Victor Hugo)의 드라마 두 편 <Lucrèce Borgia>와 <Marie Tudor>를 번역한다. 그해 가을과 겨울 사이에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에 관한 연구에 몰두하면서, 한편으로 돌 잉어의 신경조직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여, 그 다음해에 이 연구논문을 취리히 대학의 철학부에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한다. 1836년에 들어 뷔히너는 세 차례에 걸쳐(4월 13일, 4월 20일, 5월 4일) 슈트라스부르크의 자연역사협회에서 물고기의 신경조직에 관한 연구결과를 발표하고, 초여름에는 <레옹세와 레나 (Leonce und Lena)>를 집필하고 <보이첵 (Woyzeck)>의 구상작업에 들어간다.

같은 해 9월에 박사학위논문이 통과되어 취리히 대학에서 학위를 받는다. 10월에는 거처를 취리히로 옮기고, 11월 초에 <두개골신경에 관하여>라는 테마로 취리히 대학에서 시험강의를 하고, 겨울에 <보이첵>을 완성한다. 1837년 1월말에 그는 치명적인 병에 걸리고, 2월부터는 병석에 눕게 된다. 그 후 일주일이 지나면서부터 그의 의식은 혼미상태에 들어가고, 2월 19일에 뷔히너는 더 이상 깨어나지 못하고 영면한다. 이틀 후 그는 취리히의 크라우트 가르텐이란 공동묘지에 안장된다.

   
 

<보이첵>의 내용은 비교적 단순하다. 프레드리히 요한 프란츠 보이첵, 육군 일등병 제 2연대 2대대 4중대 소총수, 그에게는 사랑하는 여인 마리가 있다. 보이첵은 군대에서는 상사의 면도를 해 주며, 의사의 명령에 따라 매일 완두콩만 먹고, 소변 량이나 감정의 상태를 점검 당한다. 가난하기에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삶의 희망도 가질 수 없는 나약한 인간 보이첵을, 의사는 자유의지를 상실한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고, 자신의 실험용 집토끼인양 이용하고 학대한다.

이렇듯 계속되는 정신적, 육체적인 착취로 인하여 보이첵은 점점 극심한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지칠 대로 지친 보이첵과 더불어 마리는 자신의 답답한 현실 속에서 어떠한 탈출구도 찾지 못한 채 정신적 고립감에 지쳐간다. 어느 날, 한 가설무대에서 악대장은 보이첵과 함께 온 마리에게 눈독을 들인다. 악대장은 마리에게 야성적 손길을 뻗친다. 마리는 육체적, 경제적 능력을 지닌 매력남 악대장의 유혹에 이끌려 그와 통정을 하게 된다. 보이첵은 악대장과 마리의 관계를 눈치 챈다. 그러나 보이첵으로서는 어떤 항의나 항변도 못하고 그저 가슴에 묻어둘 뿐이다. 의사와 중대장은 그러한 보이첵을 조롱하고 보이첵에게 야유를 퍼붓는다. 견디다 못해 보이첵은 마침내 자신의 유일한 안식처이자 사랑하는 여인인 마리를 살해한다.

프랑스 작가 프로스페르 메리메는 같은 사건을 소재로 소설 <카르멘>을 썼다. 메리메의 카르멘은 1845년에 발표되었지만, 오랫동안 비평가들에게 묵살당해 온 불운한 작품이었다. 메리메의 사후 비제가 <카르멘>을 오페라로 만들어 성공함에 따라 메리메 원작 소설 <카르멘>의 진가도 널리 인정받게 되었고. 뷔히너의 희곡 <보이체크>도 새롭게 평가받게 되었다. 그러나 비제는 오페라 <카르멘>의 초연의 실패로 요절했고, 뷔히너 역시 <보이체크>를 완성하지 못하고 요절했다. 모두 19세기에 발생한 일이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세태와 생활, 그리고 사람들의 자유분방(自由奔放)한 사고는 <보이체크>나 <카르멘>을 재평가하게 되었고, 드디어 21세기인 오늘날에는 <카르멘>은 세계도처의 극장에서 공연되는 최고의 인기 오페라가 되었고, 영화로도 제작되었으며, <보이체크> 역시 마찬가지다.

무대는 배경 쪽으로 좁혀지는 팔자(八字)형의 벽으로 만들어진 무대다. 하수 쪽 벽면은 무대중앙으로 3분지 1정도만 돌출되어 있고, 상수 쪽 벽면은 중앙을 조금지나 돌출되게 만들어져 있다. 상수 쪽의 벽면 뒤와 배경 사이길이 등퇴장 로가 된다. 무대 상수 쪽 객석 가까이에도 등퇴장 로가 있다.

하수 쪽 벽면에 깨어진 거울이 달린 화장대와 의자가 있고, 상수 쪽에도 등받이가 없는 긴 의자가 있어, 장면변화에 따라 이동시켜 사용한다. 극단 노을의 연극에서는 원작의 출연인물을 축소시키고, 대사보다도 동선과 동작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관객의 상상력이 동원되도록 연출을 했다.

   
 

보이첵의 여인 마리와 군악대장의 마주 서 있는 장면 하나만으로 후에 귀걸이를 다는 마리의 모습에서, 두 사람의 밀착됨을 감지할 수 있고, 군악대장과 마리의 정사장면도 멋진 탱고를 추는 장면으로 연출해 내는 등 장면 장면에서 연출기량이 드러난 공연이라 하겠다.

김인수가 닥터, 박우열이 중대장, 신동선이 보이첵, 한 설이 마리, 전민혁이 악대장으로 출연해 각자 나름대로의 성격창출과 호연으로 갈채를 받는다.

조연출 송영재, 무대감독 권민수, 무대디자인 임일진, 음악감독 박진영, 음향디자인 이상규, 안무 안병순, 의상디자인 장혜숙, 조명디자인 박상준, 소품디자인 서현석, 안무지도 박소현, 무대감독 권민수, 기획 서현석 등 스텝 모두의 열정이 드러나 극단 노을의 게오르크 뷔히너 원작, 오세곤 재구성·연출의 <보이첵>을 성공적인 공연으로 탄생시켰다.

주요기사

 
저작권자 © 문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