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근교로 영화랑 여행가기

   
▲ 해군 첩보부대 대위 장학수 역을 맡은 이정재.

[문화뉴스] 영화랑 여행가기. '팔미도'와 '영흥도'.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에 대항했던 연합군과 남한의 합동 작전이었다. 국제연합군 최고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는 모두의 반대 속에서 성공확률 5000:1, 불가능에 가까운 작전을 감행했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단 하나, 인천으로 가는 길이 확보되어야 하는 것뿐이다.
 
맥아더의 지시로 대북 첩보작전 'X-RAY'에 투입된 해군 첩보부대 대위 '장학수'는 북한군으로 위장 잠입해서 인천상륙 함대를 유도하는 위험천만한 임무에 나선다.
 
   
▲ 영흥도 지도.
1. 영흥도
 
관광코스안내
영흥도선착장 - 십리포해수욕장 - 국사봉등산 -장경리해수욕장- 광어양식당 - 용담리해수욕장- 해군여흥도전적비 - 영흥도선착장 (대한민국 구석구석 참고)
 
[십리포 해변]
십리포해변은 인천에서 서남방으로 32Km떨어진 영흥도의 북쪽에 위치한 해변으로써이 곳 해변은 총길이가 1Km폭 30m의 왕모래와 작은자갈로 이루어진 특이한 지역으로 야간에는 수평선너머로 인천광역시 및 인천 국제공항의 찬란한 조명이 어우러져 한폭의 그림처럼 보이는곳이다. 또한 해변의 후면에는 특이한 모양의 소사나무가 자생하고 있는 우리나라 유일의 150년 된 최대의 군락지로서 97년 인천광역시 보호수로 지정하여 보호되고 있다. 또한 2004년 7월 15일부터 팔당댐의 상수도가 공급됨으로써 여름철 물부족현상을 해결하여 관광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통일사]
6.25전쟁시 전사한 남편의 넋을 기리며 하루 속히 통일되기를 기원하기 위하여 건립한 사찰이다. 영흥면의 최고봉 기슭에 자리잡은 이 통일사는 울창한 숲과 멀리 수평선 위로 오가는 외항선을 바라볼 수 있어 답답한 가슴이 후련해지는 곳이기도 하여 휴식을 취하려는 관광객이 자주 찾는 곳이다. 
   
▲ 해군 영흥도 전적비.
 
[해군영흥도 전적비]
6.25전쟁시 십리포 지역은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정보수집 캠프가 설치되어 있던 장소로서 1950년 9월 15일 세계 역사에 빛나는 인천상륙작전 전투를 성공리에 끝내는데 초석역활을 한 곳이다. 또한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한 장병과 영흥도 주민으로 조직된 대한 청년단 방위대원 등이 이 전투에 참여하였으며 이 작전 기간 중 9월 13일 청년방위 대원들이 703함대의 필사적 함포 지원 아래 북괴군 대대급 병력을 물리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이 전투시 순국한 해군 영흥지구 전투전사자와 영흥면 대한청년단 방위대원 14인의 숭고한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곳이다. 
 
   
▲ 팔미도에서 감상하는 일몰.
2. 팔미도
2009년 1월부터 일반 관광객은 팔미도를 관광할 수 있게 되었다. 팔미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최초의 등대가 있으며, 이는 인천연안부두에서 뱃길로 30분 거리이다.
 
팔미도선착장에서 계단을 올라가면 등대 직원 숙소와 전망대가 나타난다. 해발 58m의 최고 지점에 팔미도등대 2기가 세워져 있다. 작은 등대가 1903년 6월부터 불을 밝히기 시작한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이다. 한국전쟁중에는 UN의 인천상륙작전을 도왔다. 지금은 2003년 12월 22일에 새로 세워진 등대가 뱃길을 밝혀주고 있다. 팔미도등대는 일본이 러일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석유를 사용해 불을 밝혔다. 건립 100주년인 2003년 퇴역하고 위성항법시스템까지 갖춰진 새등대에 임무를 넘겼다. (대한민국 여행사전 참고)
 
   
▲ 팔미도 등대 옛사무실.
1950.8.12
인천상륙작전 계획

1950.8.20
해군 첩보부대의 영흥도 상륙작전 및 첩보활동 개시

1950.9.1
클라크 미 해군 대위 영흥도 도착
해군 첩보부대 활동정보 맥아더 사령부 송신

1950.9.15
팔미도 등대 점화 및 인천상륙작전 개시
 
   
▲ 팔미 등대.
대북 첩보작전 'X-RAY'는 당시 해군정보국 예하의 첩보부대가 인천 앞바다에 위치한 영흥도를 거점으로 두고 인천에 잠입하여 인천상륙작전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을 주 임무로 했던 작전이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결정과 더불어 동경에 주둔하고 있던 극동부 사령부는 정보 수집을 위해 미군 첩보부대 투입을 고려했으나, 언어의 장벽과 현지 지리에 낯설다는 한계때문에 대한민국 해군정보국에 이 임미루를 일임한다.
 
1950년 8월 17일 극비리에 부산항을 출발해 영흥도에 상륙한 첩보부대는 인천지역 북한군의 배치 현황, 보급선과 현황, 해로의 기뢰 매설 여부, 상륙 지점 지형, 인천항의 안벽 높이, 북한군의 방어진지 등 인천과 월미도를 중심으로 한 서해안 일대의 적정을 수집했다.
 
   
▲ 국제연합군 최고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역을 맡은 리암 니슨.
영흥도를 거점으로 통신, 경비, 정보 분석을 임무로 맡은 장정택 중위 팀과 인천 등지로 잠입하여 정보 수집의 임무를 맡은 김순기 중위 팀, 임병래 중위 팀의 3개 팀으로 나뉜 첩보 부대는 본격적인 작전에 착수한다. 그리고 9월 14일,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모든 준비를 완료한 극동군사령부는 인천상륙작전 개시가 임박함에 따라 영흥도 첩보기지에 '모든 임무를 끝내고 철수하라'는 명령을 하달한다.
 
철수 준비를 서두르고 있던 첩보부대는 북한군 1개 대대가 영흥도로 기습해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에 영흥도에는 임병래 중위를 비롯한 해군 첩보부대 9명과 해군 의용대원 30여 명만이 남아 임병래 중위의 지휘 아래 북한군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 켈로부대 인천지역 대장 서진철 역의 정준호.
해군 첩보부대와 민간 의용군의 탈출을 위해 6명의 해군 첩보대원들은 퇴로가 차단된 가운데 포위될 위기에 직면하게 되고, 이에 임병래 중위와 홍사욱 하사 둘만이 남아 공격을 차단함으로써 나머지 대원들의 탈출을 돕고 끝내 북한군에 포위된다. 하지만 인천상륙작전을 불과 24시간 앞둔 시점에서 포로가 될 경우 작전이 탄로 날 것으로 판단한 임병래 중위와 홍사욱 하사는 작전의 승패를 좌우하는 군사기밀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글] 문화뉴스 김진영 기자 cindy@mhns.co.kr
[사진] 인천관광공사, 옹진군관광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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