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리디아가 만나는 대한민국 최고예술가 100'은 오랜 문화예술계 및 방송 경력으로 다져진 그가 문화뉴스의 부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만들어진 특별한 코너다. 대한민국의 예술계를 이끌어온 아티스트들의 노고를 기리고 그들의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자 기획됐다. 어디에서도 쉽게 듣지 못하는 탑아티스트들의 진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박리디아는?]

 

[문화뉴스] 한국현대무용계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의 중심에 있는 인물을 만났다.

 
바로 안애순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이다. 그는 1980년대 한국에 생소한 현대무용 중 하나인 컨템포러리를 국내에 소개한 대표 안무가 중 한 명이다. 1985년 안애순무용단을 창단한 후 전통과 현대무용을 '콜라보레이션'하는 작업을 진행해왔다. '불쌍', 'S는 P다', '열한번째 그림자' 등 다양한 현대 무용작품을 안무해왔다.
 
2010년부터 2012년까지 한국공연예술센터 예술감독을 역임한 그는 2013년 여름, 국립현대무용단의 제2대 예술감독으로 취임했다. 안애순 예술감독의 취임 기간, 국립현대무용단은 다양한 시도를 했다. 2014년 '역사와 기억'이라는 주제로 한국 현대무용의 역사에 대한 재검토와 기억의 행위를 통해 현재를 성찰했다. 지난해는 '밑, 끝, 바깥'으로 몸과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의 다원화를 화두로 삼았다. 올해는 '접속과 발화'를 주제로 장르와 형식의 제한과 한계를 넘으려 시도하고 있다.
 
13일부터 15일까지 안애순 예술감독이 안무를 맡은 '공일차원'이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서 공연된다. 연습이 한창이었던 지난 4월, 안애순 예술감독을 만나 그의 예술관과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으로 활동하면서 느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현장으로 지금 떠나본다.
 
 
문화뉴스가 선정한 '대한민국 최고 예술가 100인'에 선정됐다.
ㄴ 30년 동안 안무가와 무용가로 활동해오다가 개인 자격이 아닌 국립이라는 자격으로 오면서 개인적인 작가관이 무용계, 공연예술계, 더 나아가 한국 문화계로 확대되고 있다. 그래서 작업의 방향이나 우리들의 실험도 굉장히 장르의 경계를 넘어 확대되고 있다. 새로움을 도모하고, 젊은 예술가들이나 역사에 있는 어른들까지 함께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프로젝트를 만들고 있다. 늘 바쁘다. (웃음)
 
개인에서 국립이라는 자격으로 이끌어가야 하다 보니, 작품의 방향도 바뀔 것 같다.
ㄴ 가장 중요하게 한건 '컨템포러리댄스'다. 동시대의 것을 가지고 우리 이야기로 매번 만들어야 하는 창작의 목표가 있다. 우리가 규정지은 무용이란 형식이 아니라 '컨템포러리'라는 이름으로 융·복합적이면서, 개념적이고, 무용과 텍스트가 함께하는 작업을 꿈꾸고 있다. 공연 공간도 극장에서 미술관이나 야외로도 이어지고, 무용의 담론을 위해 예술가들과 만날 수 있는 장들도 마련하고 있다.
 
일반인 대상으로 춤에 대한 이해 교육을 통해 프로페셔널과 논프로페셔널 경계도 생각 중이다. 컨템포러리라는 이름으로 더 열려있어야 하고, 다 들어가서 적극적으로 융합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일련 프로젝트 10개 넘게 하고 있는데, 다른 형식 들어가 있고 교육프로그램이 있으므로 끊임없이 여러 스타일로 관객을 만나고 작품 실험적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 '공일차원'의 한 장면. ⓒ 국립현대무용단

 

1985년 안애순무용단 창단 후 활동 당시엔 컨템포러리댄스가 국내에선 생소한 상황이었다. 컨템포러리댄스를 도입하려고 한 이유는?
ㄴ 현대무용의 역사엔 모던과 컨템포러리 시대가 있다. 20세기 초반부터 1960년대까지를 모던댄스라고 하고, 그 후 포스트모던과 컨템포러리라는 용어가 등장하게 됐다. 국내에선 이걸 통틀어 현대무용이라고 한다.
 
국내 컨템포러리댄스에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육완순 선생님이셨다. 뉴욕의 모던댄스를 연구한 마사 그레이엄의 테크닉을 가져오셨는데, 지난해 선생님이 창단한 한국컨템포러리무용단이 해단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개인적 활동도 하지만, 선생님의 제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우리는 모던과 컨테포러리의 중간에서 활동했고, 여러 작가분이 나오신 계기였다.
 
무용에 생소한 대중을 위해서 모던과 컨템포러리의 차이를 알려달라.
ㄴ 세트나 음악 등을 통해 인간 내면의 이야기나 심리적인 것을 모던댄스에서 많이 다룬다면, 포스트모던댄스는 극장을 거부했고, 누군가의 어떤 테크닉을 배워서 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자유롭고 일상적인 소재로 진행했다. 예술이 조금씩 달라졌다. 일반인의 삶을 예술로 끌어올리고, 고급과 저급 등을 가리지 않았다. 앤디 워홀의 그림을 예로 볼 수 있다. 그것이 무용 쪽에도 반영됐다.
 
포스트모던댄스는 춤이 약소화하고, 평범하고, 극장을 거부하고 야외로 나가거나 창고를 찾았다. 예술이 따로 존재하고, 환상이 따로 존재하고, 극장이라는 이름으로 장식되지 않고자 했다.
 
그러다 예술가들이 예술적 행위를 하지만, 예술가가 사는 시대에 관점을 가지고 사회적 예술을 하는 것이 컨템포러리라 할 수 있다. 한 개인이 인간의 내면과 부조리 등의 싸움이 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춤에 대한 전복을 이야기하고, 컨템포러리로 오면서 예술가의 사회적 발원, 관점을 다른 사람들에게 담론을 던지는 것으로 발전되고 있다.
 
 
컨템포러리를 하면서 한국의 전통 소재도 동시에 사용했다.
ㄴ 처음엔 어떤 것이 먼저인지 몰랐었다. 한국무용, 발레, 현대무용을 같이 배웠다. 그래서 꼭 발레, 한국무용이 어때야 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배우고 흡수했다. 대학교에서 창작발표회를 할 때 이게 발레인지 한국무용인지 규정을 짓지 않았다. 진정한 창작의 재료로, 어떻게 섞이더라도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시대가 좀 더 멋있는 시대였다. 지금은 구분되면서, 춤도 규정짓고, 새로운 창작이 나오지 않는 안타까움이 있다.
 
나는 한국적인 소재가 재밌었다. 한국 춤이 가진 호흡법 내지는 즉흥적인 것이 있었다. 보통 서양의 발레를 기본으로 한 릴리스 테크닉 등 체계화된 이론이 많지만, 우리만의 정서나 역사로 가지고 온 그 움직임으로 우리만의 해석으로 춤 개발이 가능할 것이라 봤다. 그래서 움직임에 관심이 많아서 나는 전통을 찾았다. 프랑스 안무가들이 항상 유니크한 무브먼트를 만들어 냈다고 이야기했다. 
 
전통은 나에겐 하나의 배움 같은 것이다. 배우면서 새로운 자극을 주는 것이다. 불교음악 등을 많이 썼는데, "왜 세계의 많은 안무가가 창작이라고 내놓는데 전통의 것을 내놓는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전통이지만 나에겐 지금 처음 접하는 것이라 새로웠고, 여기엔 역사를 더불어서 종교성, 문화성이 다 드러나 있다. 미니멀음악(편집자 주 : 사용하는 악기와 음의 움직임을 극도로 제한해 듣는 이의 적극성을 끌어내는 음악)이 사실 다 동양음악에서 다 들어온 것이다. 있던 음악에서 발췌해서 컨템포러리와 같이 발표된 것이다.
 
우리는 그 전통이 불교음악을 통해 있던 것이다. 그래서 너희가 생각하는 가장 새로운 컨템포러리음악이 전통에 있었다고 답했다. 새로운 것과 옛 것을 따지기 전에, 작품에서 움직임이 구상되고, 무슨 이야기가 떠오른다고 했다. 나에겐 항상 전통이지만, 새로움의 시작이 전통에서 온다고 이야기한 것 같다.
 
▲ '이미아직'의 한 장면. ⓒ 국립현대무용단
국립현대무용단에 와서도 개인적 작업을 떠나, 전통의 재발견, 아카이브 플랫폼 등 여러 프로젝트를 했다. 전시 개념으로 한국의 컨템포러리 소극장 운동이 시작된 공간을 다시 조명하고, 인터뷰, 책자, 자료를 기록 전시로 남기고자 했다. 그들의 컨템포러리는 그 시대에 어떤 뜻이었고, 우리는 과연 어떻게 발전시키고 지속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려 했다.
 
컨템포러리 초기엔 장르의 경계도 없었다. 1980년대 소극장 '공간사랑' 무대 당시엔 발레, 연극 등 예술 장르의 구분이 없었다. 1인 창무극의 창시자였던 故 공옥진 선생님도 있었고, 연극계엔 오태석 선생님도 있었고, 시인인 故 구상 선생님도 있었다. 콜라보라는게 이미 있었다.
 
한국현대무용계의 어제, 오늘, 내일의 중심에 있다.
ㄴ 어제, 오늘, 내일이 되게 뿌열 때가 많다. 무용가로 일을 한다는 것이 그렇다. 제도적인 것들이나, 공연예술이나 무용에 대한 관심, 막연함 등이 있었다. 오늘 아침에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 극장 프로그래머 하시는 분들에게 강연을 하고 왔다. 그들도 현대무용을 한 번도 프로그래밍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지역 관객분들에게 언제 현대무용을 보여줄 것이고, 지금은 관객이 없지만, 관객이 온다는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다는 답변을 들었다. 계속된 막연함이 나를 열심히 하게 하려는 것 같다. 처음엔 춤이라는 것을 잘 몰라서, 내가 과연 재능이 있는 것인지, 무용을 해야 하는 건지, 무용이 뭔가라는 개념에 질문하기도 했다.
 
그리고 무용단체를 이끌면서 작업을 지속하면서도, 무언가 마련되지 않는 환경에 대해 답답하기도 했다. 국공립 단체에 와서 크게 보니 더 많은 일이 있고, 공연예술이라는게 나만을 위해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남들과 소통하기 위한 것인데, 이 많은 문제를 현장에서 어떠한 방향으로 예술을 지킬 것인지가 되게 답답하게 느껴진다.
 
▲ 지난 2월, 국립현대무용단의 '2016 연간사업발표' 기자간담회가 진행됐다. ⓒ 국립현대무용단
한국무용계의 현 문제는 무엇이라 생각하나?
ㄴ 창작에 대한 것이다. 클래식, 발레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누적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히 있다. 하지만 예술가들 스스로 전통무용, 발레, 현대무용이라고 규정짓지 않고, 창작의 의미로 열려 있어서, 시대의 흐름으로 감각이 바뀌고, 다양해져야 하는 것에 다양하지 못하고 있다. 답습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 공연예술계 관객들은 알고 있는 '지식'만큼 오는 것 같다. 연극을 예로 들면, 텍스트가 있으므로 그들이 경험한 것과 이해할 수 있는 선에서 모험한다. 그래서 늘 과거형에 있을 수 있다. 현대 미술, 무용 등은 본인들이 몰라서 먼저 무서움을 느끼고, 난해하다는 말을 작품을 보지도 않고 이야기한다.
 
그건 소문일 뿐인데, 오는 것 자체에 거부감이 드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무용 시장이 커지거나 레퍼토리가 만들어지는 데에서 많은 걸림돌인 것 같다. 그래서 첨단 과학기술의 세계에 살면서 정작 새로운 모험도 결국은 소수의 '과거형 문화'에 아는 것만큼 경험할 수밖에 없게 됐다. 그래서 과거형과 현대형이 골고루 배치되고 이뤄져야 한다. 
 
균형을 이루려면 무게감을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 그러한 균형감을 알아낸다는 것은 상당한 경험이 있어야 할 것 같다.
ㄴ 중간에 누가 가이딩을 해줘야 한다고 본다. 요즘 관객들은 타인들은 '일반 대중'이라고 하는데, 예술가보다도 풍부한 상식과 경험이 있다. 예술의전당 안에 있는 아카데미만 봐도 엄청난 인문학과 실제 전문적인 수준까지 경험을 요구한다.
 
그래서 작업을 하면서 긴장이 된다. 관객이 아니라고 할 때, 거꾸로 우리가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들이 있다. 관객들이 경험하고 있는 문화, 생활, 레크리에이션 등 모든 것을 더해서 공연을 보러오는데 자신들이 기대하는 감각에서 동떨어져 있어, 관객이 안 들어올 수 있다고 본다.
 
▲ '어린왕자'의 한 장면. ⓒ 국립현대무용단
물론 우리는 무시할 수 있지만, 그런데서 예술가들은 각성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기준을 만드는 사람이 다시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누구는 현대무용을 보려면 발레를 경험하고, 미술도 경험하고, 다른 문화예술 콘텐츠를 봐야 해독할 수 있다고 하는데, 나는 순서가 없다고 본다.
 
관객이 "이 장면은 어떨 것이다"라고 생각하거나, "저게 뭐지"라고 꼬리를 잡고 끼워 맞추려는 등 모든 해독법을 무장을 해제하고 보면 그게 감상이고 충격일 건데. 막 읽으려고 한다. 대화할 때도 남의 말을 듣는 게 아니라 자기 생각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그래서 재미난 것이 현대무용이다.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면 '이게 좋은가? 나쁜가'라는 내용을 보여주면서, 그것이 하나의 공동이슈가 되고 담론이 된다.
 
앞서 질문한 비중의 균형을 이야기로 돌아간다면, 한국의 공연예술계 프로그래밍엔 과거가 많다. 해석은 없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작품을 보고, 이해하려 한다. 남들이 다 써놓은 걸 보면 동화 같다. 현대무용은 우리 사회와 삶, 한 인간의 이야기다. 같이 공감할 수 있는 게 있고, 관점이 좋을 수도 있고 싫을 수도 있다.
 
그래서 굉장히 복잡한 사회와 시대의 생각들이 이 작품에 얹어지는 것이 매력이다. 사람들은 그 묘미를 모른다. 공주와 왕자가 러브스토리를 한다는 것이 우리 삶의 이야깃거리는 아닐 수 있다. 예를 들어, "클래식이다. 그게 '백조의 호수' 이야기구나"라고 하는 등 또 다른 현실을 해독해서 어떤 예술적 행위로 던졌는지가 현대무용의 감상법이다.
 
하지만 감상법 준비가 잘 안 된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중간의 무언가가 잘못된 것이다. 그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프로그래밍이 되어야 하는데 이 점이 안타깝다. 요새 창작이 잘 안 되는 것이, 지식을 퍼와서 연결하는 식이다.
 
터키로 여행을 갔는데, 선생님들이 봄방학 때 부부동반 여행을 갔나 보다. 한 그룹이 애를 데리고 왔는데, 도슨트가 한 말을 아이한테 설명한다. 자식이 설렁설렁 작품을 보고 있어서 그런지, 저 색은 뭔 의미가 있고, 몇 세기에 만들어지는 등 외운 거 그대로 주입식으로 알려주고 있었는데, "입 좀 다물어라"라고 하고 싶었다. 저런 교육을 하면 무슨 상상력이 있겠는가?
 
▲ '공일차원'의 한 장면. ⓒ 국립현대무용단
개인적인 시선으로 눈을 돌려본다. 본인 창작의 황금기는 언제나 생각하나?
ㄴ 나는 지금이라 생각한다. 안애순이라는 사람을 이야기하면 작품과 연관되어 있다. 예술감독 직위에 대한 부분은 아니다. 과거 내가 재능이 있던 시절엔 다들 나만 보고 있다. 그런데도, 앞서간다는 이야기를 하면 뭐하겠지만 변화하고 있다. 동시대 예술가들의 것들을 내 무용에 담을 때마다 새로워지고 변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컨템포러리를 나이가 상관없이 하는 진행형 작가라 생각한다. 해외에서 인정도 받고, 프랑스 샤이오 국립극장 간다거나, 베를린 간다거나 하는 것은 나의 작업이 진행형이기 때문에 초청받을 수 있다고 본다. 올해로 내가 30년을 해서 외국에서 초청할 일도 없고, 그들의 관심사도 아니다. (웃음) 그래서 지금이 황금기인 것 같다.
 
가장 창작의 고통을 많이 느꼈던 작품 세 가지만 뽑는다면?
ㄴ 1998년 '열한번째 그림자'를 하면서 전통과 한국적 소재, 움직임 이야기를 많이 했었다. 내 인생의 1기에 해온 작품이었다. 그게 기억에 남는다. 그러다 내가 만든 형식에 내가 물렸다. 그 형식을 깨지 않으면 나는 더 이상의 지루해서 못 참을 것 같았다.
 
이에 2000년에 굿인 '비명'을 하게 됐다. 놀이성, 즉흥성, 해체성 등 굿의 여러 개념은 세계적으로 컨템포러리하는 사람들이 말하고자 한 개념이었다. 안무가가 무용수들을 기계처럼 구상한 것이 아니라, 굉장히 놀이적이면서 무대에서 즉흥적이고 일상적인 요소로 어떤 것들이 짜였는지 보게 해준 게 아니라 찰나의 순간 때마다 다른 것이 나올 수 있다. 관객들이 만날 때 새로운 게 나올 수 있었다.
 
2000년 '비명'을 할 당시, 30분 동안 무용수들이 '놀이'하면서 놀고 있었다. 당시 관객들은 "쟤네들이 자기네들끼리 뭐 하는 거야"하고, "안애순이 미쳤다"하면서, "할 게 없어서 무슨 짓을 하는 거니"라고 했다. 욕을 했다는 사람들이 지난 후에 충격이 왔고, 무용의 흐름에 즉흥성과 놀이성이 영향을 미치게 됐다. 내 인생 2기의 시작이었다.
 
이후 사회의 구성원으로, 그 시간대 우리가 문제가 포착됐다. 2007년 '백색소음'은 현대에 어쩔 수 없이 억압받고 있지만, 알지 못하는 억압을 이야기했다. 백색소음은 바로 '위잉'하는 에어컨 소음이다. 그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고, 우리가 그 시그널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도 있다.
 
'백색소음', '갈라파고스' 등 사회에서 회복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공일차원'도 현실의 삶에서 도피하거나 회복할 수 있는 우리 욕망을 채울 수 있는 것이 전제된다. 이런 작품들이 나의 3기를 시작하는 작품이라 보면 된다.
 
 

앞으로 계획은 무엇인가?
ㄴ 우선 13일부터 15일까지 열리는 '공일차원'을 잘 해야 한다. 지난해 샤이오 국립극장에 초청된 '이미아직' 작업을 했는데, 공연 첫해 당시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다. '이미아직'은 죽음과 장례문화를 이야기하는데, 작품을 그 전에 만들었음에도 사람들의 감상 태도가 달라져서 여러모로 환영받지 못했다.

 
지난해 '공일차원'을 할 땐 메르스 때문에 힘들었다. 관객과 만나는 과정이 좋지 않아서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 레퍼토리화 했다. 1년에 한 번의 작업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되어야 레퍼토리도 완성도 있게 만들어진다. 올해는 신작하지 않고, 레퍼토리로 하고 있다.
 
유럽은 지금 컨템포러리의 중심에 선두주자로 있다. 특히 프랑스 파리는 메카라고 할 수 있다. 샤이오 국립극장에 들어가서 관객들을 만날 때, 과연 우리의 작업을 어떻게 보느냐는 걱정도 된다. 아시아 최초로 '종묘제례악'도 지난해 처음 공연됐지만, 컨텀포러리 아시아 안무가로는 최초여서 의의가 있다.
 
이어 벨기에 리에주 극장도 예정되어 있고, 루마니아 페스티벌도 참여하게 된다. 쉽지 않은 유럽 시장의 첫 문을 여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국립현대무용단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다. 앞으로 지속적인 확대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관심이 쏠려있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ㄴ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많은 사업과 프로젝트를 하면서 1년에 1,500명 가까운 아티스트가 왔다 갔다 하는데 공간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예술가들이 좀 더 편안하게 레지던시 하면서 예술을 도모할 수 있는 곳이 더 만들어지길 바란다. 예술가들은 정보를 같이 교류해야 하는 것이 바르다고 본다. 그런 장소를 꿈꾸고 있다.
 

[글] 문화뉴스 박리디아 (Lydia Park)_본지 부사장 golydia@mhns.co.kr
[정리] 문화뉴스 양미르 기자 mir@mhns.co.kr

주요기사
관련기사

 
저작권자 © 문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