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누가 만들어 주는 게 아니에요

우렁각시농장 박정자 대표

우렁각시농장을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강원도 평창 읍내를 벗어나 차 한 대가 겨우 다니는 산길을 굽이굽이 돌자 그제야 팻말이 나타났다. 거기서도 산비탈을 다시 200미터 정도 올라가서야 농장의 전경을 볼 수 있었다.

"오시느라 힘드셨죠" 양갈래로 땋은 머리가 인상적인 중년의 여성이 반갑게 기자를 맞아주었다. 앳된 말투와 해맑은 웃음이 10대 소녀 같았다. 어릴 적 TV에서 본 '말괄량이 소녀 삐삐'의 모습이 떠올랐다.

화려한 도시의 삶을 거부하다

박정자 대표는 강원도 평창군 삼방산의 산골에서 마카와 멜론·삼채·사과 등을 작목으로 3만 3,000㎡ 규모의 농사를 짓고 있다. 흔치 않은 여성 농업인인 데다 연간 1억 원의 수익을 올리는 ‘성공 사례’로 여러 번 방송에도 소개됐다. 특히 페루 안데스의 산삼이라 불리는 슈퍼 푸드 ‘마카’ 재배를 성공해 주목받고 있다.

소위 ‘386세대’인 박 대표에게 인생은 그저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고 시집 잘 가는 것이 정답이었다. 답안대로 착실히 살았다. 남들과의 경쟁에서 지지 않으려 노력했고 부모가 원하는 딸의 모습을 갖추려 노력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런 게 늘 싫었다. 하나의 성취를 이룰 때마다 공허함이 밀려왔다. 쇼핑하고 골프 치러 다니는 삶이 어느 날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자 더 이상 꿈을 미룰 수 없다는 생각에 큰 결심을 했다. 도시를 훌쩍 떠나 시골로 내려갔다.

"2003년에 홀로 지리산 자락의 실상사 귀농학교에 들어갔어요. 그곳에서는 한 달에 10만 원이면 살 수 있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미니멀 라이프'를 터득했죠. '내 한 몸 추스르는 데 많은 돈이 들어가는 게 아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아울러 귀농학교에서 친환경 농법에 대해 제대로 배우게 됐습니다. 이때 습득한 친환경 농법으로 맑은 공기와 깨끗한 땅이 있는 평창에서 친환경 농장을 일구어 낼 수 있었습니다"

박 대표는 3개월 정도 논농사를 지은 다음 전라남도 장흥군의 천관산 근처로 거취를 옮겼다. 본격적인 시골살이의 시작이었다. 장흥에서 어느 정도 정착이 이뤄졌을 때부터 알고 있던 한국농수산대학을 가자고 마음먹었다. 계기가 있었다.

박 대표가 사는 마을은 30대 초반의 이장 부인이 가장 어렸고 그다음이 40대 초반의 그였다. 그 외에는 구성원들이 거의 70대 이상의 노인들이었다. 그나마 가끔 보이는 40~50대 노총각이 사는 컨테이너에 다방 아가씨들이 들락거리는 삶의 모습은 척박해 보였다. 그런 농촌의 현실과 문화가 그 사람들의 책임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에서 소비적인 생활만 하던 박 대표는 뭔지 모를 미안함과 함께 책임감 같은 것을 느꼈다.

마흔다섯의 나이에 한국농수산대학에 진학하다

도시에서는 단순 노동직으로 일하기도 쉽지 않은 나이였지만 박 대표는 마음먹으면 일단 움직이는 성격이었다. 여성 농업인의 롤모델이 돼 보자는 생각도 품었다. 그렇게 2005년에 한국농수산대학 특용작물학과에 9기로 입학했다. 학비가 무료인 만큼 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공부했다. 박 대표는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사는데, 자주 "하느님 고맙습니다" 하면서 하늘에 손을 흔든다고 한다.

한국농수산대학에 진학하고 나서 얼마 후 영월의 국유지를 임차해 본격적인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부모님의 영농기반을 물려받는 다른 학생들과 달리 박 대표는 주중엔 기숙사 생활을 하고 주말이면 영월로 가서 농사를 짓는 스파르타식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고된 생활이었지만 배움에 대한 즐거움에 하루하루가 너무 소중했다"고 박 대표는 당시를 회상했다.

특용작물 하면 보통 약초 재배를 우선으로 생각하는데, 박 대표는 고랭지 작물에서 가능성을 봤다. 고랭지는 일교차가 커서 작물의 맛이 뛰어나 상품성이 좋고 재배에도 강점이 많다. 박 대표는 고랭지 작물을 재배할 수 있는 곳을 물색했다. 추위에 자신이 없는지라 산속에서 삽 한 자루로 움막을 짓고 생존할 수 있는 곳으로는 평창이 마지노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평창도 겨울이면 영하 20도까지 내려갔다. 박 대표는 "작년에 10년 만에 감기에 걸렸다"며 웃었다.

평창에 들어와 처음에는 작은 농장에 300여 가지 작물을 심고 기르는 법을 익혔다. 3만 3,000㎡ 규모의 농사를 부부 두 사람의 힘으로만 지으려면 효율도 중요하기 때문에 여러 작물을 재배해 보며 맞는 작물을 선택했다. 새로운 것을 보면 일단 330㎡ 정도에 샘플을 키워 출하해 보고 전망이 있어 보이면 늘렸다. 그렇게 쌓은 노하우와 친환경 농법이 지금의 박 대표를 만들었다.

강남 아줌마, 진짜 농부 되다

앞만 보고 쉼 없이 달려온 덕에 아무것도 없이 시작한 제2의 삶도 이제 안정기에 들어섰다. 귀농한 지 10년이 넘으면서 마카와 삼채 등 특용작물 분야의 전문가가 됐다. 농사 정보에 대한 문의가 수시로 들어오고 직접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다. 귀농을 꿈꾸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틈틈이 강의도 한다.

"도시에 살 때는 그 누구보다도 화려하게 꾸미는 것을 좋아하던 제가 시골생활 10년 넘게 스킨·로션 한 번 안 바르고 살았다면 아무도 안 믿어요. 최근에 화장을 하려고 봤더니 화장법이 생각나지 않더라고요. 화장품을 찍어 바른 제 모습도 어색하기 짝이 없었고요. 아, 내가 이제 진짜 농사꾼이 다 됐나 보다 싶었죠"

그 누구보다 열정적인 박 대표이기에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의외로 ‘계획이 없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시골에서 살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평생의 꿈을 이뤘기 때문에 먼 계획은 세우질 않아요. 땅은 뿌린 만큼 거둔다는 정직함을 가르쳐 주죠. 현재에 몰두하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한다면 땅이 그에 대한 보답을 해 주지 않겠어요? 최소 3~4년간은 지금의 농장을 가꾸는 데만 최선을 다할 생각이에요"

일반 현황

나만의 성공노트

① 성공 노하우: 아들 둘을 키우면서 세운 원칙을 식물을 기르면서도 똑같이 적용했다. 과한 신경은 쓰지 않되 안테나는 늘 세워 두는 것. 머릿속에는 항상 농작물 시계가 12가지는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 그 시스템에 맞춰 식물을 잘 키우는 게 포인트다.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의 우주이듯이 각자 자신의 원칙에 맞게 재미있게 살면 된다고 생각한다.

② 미래 계획: 오래 살고 싶다기보다 여든 즈음까지는 매년 3월에 영농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꾸려 내는 삶을 살고 싶다. 유유자적 전원을 즐기며 힘닿는 대로 농사를 지을 것이다. 동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우리 농장에는 동물들도 많다. 개들은 농장을 지키고, 닭과 염소는 농작물의 부산물들을 소비한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삶을 살고 싶다.

③ 경험자 조언: 필요하면 일단 찾아서 배우고 보는 성격이다. 굴삭기가 필요하면 국비 지원 굴삭기 교육을 받는 식이다. 마케팅이 중요한 세상이다 보니 aT센터 연구소에서 하는 마케팅 교육과 강원도농업기술원의 1년 코스 과정도 마쳤다. 주말에는 소비자들과 직접 만나기 위해 문호리 리버마켓에 나물을 팔러 나간다. 인터넷도 필요하기 때문에 잘하는 사람에게 물어보며 카카오 스토리에 포스팅도 한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직접 부딪쳐 보라고 말하고 싶다.

청년농업인, 그것이 알고 싶다! Q&A

Q. 한국농수산대학에서의 생활은 어땠었나?
A. 다른 학생들의 엄마뻘 나이인 45세에 학교를 갔다. 나이 많은 내가 한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다른 한 명의 자리를 뺏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그 몫을 하기 위해 더 열심히 했다. 이모나 엄마 같은 존재로 생활을 했는데, 어쩌면 나이 어린 동기들은 시어머니같이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뭘 하거나 눈치를 주지 않아도 그런 게 있었을 것이다. 한국농수산대학에 입학하면서 영월에 국유지를 빌려서 오미자나무를 심었었다. 학생들을 데리고 와서 같이 일하면서 노래도 하고 농업 공동체 이야기를 했었다. 즐겁고 보람 있는 추억이 많다.

Q. 특용작물 위주로 재배하고 있는 것 같은데, 대표작물은 무엇인가?
A. 현재 20여 가지를 재배하고 있는데, 팝콘 옥수수와 차요테가 대표적인 작물이다. 차요테는 아열대에 서식하는 박과 작물로 무·오이·호박으로 할 수 있는 요리에 다 사용할 수 있다. 차요테는 5월에 심어 7월에 수확을 시작해 서리가 내릴 때까지 3,300㎡ 규모에서 10t 정도를 수확하는데, 우리 농장의 효자 작물이다.

Q. 후배나 귀농인, 농업 희망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A. 딱 한 가지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농사를 시작하고 나서 "힘들지 않냐"는 말을 자주 듣는다. 뒤늦게 생각해 봤다. 안 힘들었나? 사실은 힘들다고 생각할 시간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젯밤에도 모터를 끄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잠깐 차요테 크는 걸 확인하러 밭에 들렀다. 그냥 확인만 하려던 건데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두 시간을 일했다. 힘든 것보다 늦지 않게 제때 해 줬다는 뿌듯함과 성취감을 느꼈다. 같은 행위를 하면서 고달프게 사느냐 신나게 사느냐는 마음의 문제다. 일이 힘들 때마다 "나는 해냈어"라고 스스로 독려한다. 그렇게 나를 적응시켰고, 이제는 정말 즐기고 있다.

이 인터뷰는 문화뉴스와 내일날씨가 공동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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