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서 걸어 나온 삶, 이제는 행복 전도사 됐죠

양지농원 백기석 대표

죽음에서 걸어 나온 삶, 이제는 행복 전도사 됐죠

경기도 용인시의 곤충테마파크에는 어린 시절 누구나 꿈꾸었을 법한 나무 위 오두막이 있다. "톰 소여의 모험"이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으면서 상상했던 오두막집. 나비가 장식된 밀짚모자를 곱게 쓴 날렵한 체구의 백기석 대표가 개구쟁이 소년처럼 그 앞을 빙빙 돌며 손을 흔들었다.

어릴 때부터 꽃이 좋아 꽃을 기르게 됐다는 백기석 대표. 그는 2016년 위암 4기로 시한부 1개월을 선고받았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죽음의 문턱에서 걸어 나온 그는 "동문에게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학교에 인터뷰를 요청했다"라고 말했다.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펼쳐졌다.

 

병장 말년에 국방일보를 보고 바뀐 삶

백 대표의 부모는 경상북도 문경시에서 평생 농사일을 했다. 여느 농사꾼이 다 그러하듯 부모는 아들이 공부로 출세하길 바랐다. 안동전문대학(현재 안동과학대학)에 입학한 백 대표는 입학과 동시에 휴학을 하고 군대에 갔다.

제대를 앞둔 말년 병장 시절 국방일보에 실린 한국농업전문학교(현재 한국농수산대학) 광고를 본 것이 인생 전환의 계기가 됐다. "어렸을 때부터 꽃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아버지의 일이 힘들어지면서 '학비가 들지 않는 학교로 진학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군부대 중대장님의 허락을 받고 야간에 입시를 준비했습니다"

1998년 2월, 군 전역을 하고 10일 후 한국농수산대학에 입학했다. 한국농수산대학 2회 입학생이 된 것이다. 2001년 졸업을 하고 고향 문경에서 6,600㎡로 초화 농사를 시작했다. 졸업 전 사전조사에서는 주변 지역에 꽃을 재배하는 농가가 없어 큰돈을 벌 수 있겠다는 꿈을 가지고 농사에 임했다.

하지만 현실은 쉽지 않았다. 한해살이 꽃을 재배해 시청에 납품하는 계획을 잡고 생산을 했지만, 기존에 납품하고 있던 꽃집의 기득권으로 인해 처음에는 고초를 많이 겪었다.

그러던 중 2002년 안면도 국제 꽃박람회 때 기회가 왔다. 당시 연출을 맡은 사람이 사정이 생겨 갑자기 그만두게 되면서 백 대표에게 경상남도관, 부산광역시관 연출을 맡아 달라는 제의가 왔다. 2002년 당시에는 월드컵, 아시안게임, 부산국제영화제, 광안대교 준공식 등 많은 행사가 열렸다. 최선을 다한 덕분에 부산 홍보위원으로 임명돼 부산에서 열리는 다양한 행사의 연출을 맡게 됐다.

 

때 이른 성공과 갑자기 찾아온 병마

스물일곱의 어린 나이에 꽤 많은 돈을 벌면서 건강에 자만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농장보단 화려한 방송국 일이 매력적으로 보여 인천에 있는 경인방송국의 꽃 담당자로 입사했다. 방송국에서 일을 하던 중 지인들이 용인에서 법인을 만들어 에버랜드에 납품하자고 권유해 꽃을 사랑하는 영농조합법인을 만들게 됐다. 이때부터 학교에서 배운 재배 기술들과 자료들을 보며 누구보다도 꽃을 잘 키우고자 했다.

백 대표는 꽃 전문가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상주대학교 원예학과와 고려대학교 생명환경과학대학원을 차례로 다녔다. 새벽에 농장에 나와 일하고, 저녁에는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집에는 자정에나 들어가는 생활이 이어졌다. 어느 날부터 위가 아프다기보다 사레들린 것 같은 불편함이 계속 느껴져 서울대병원에 갔다. 청천벽력의 결과가 나왔다. 위암 4기 판정과 함께 1개월의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백 대표는 수술도 못 받아 보고 죽기는 억울하다는 생각에 어떻게든 치료하기로 결심했다. 치료 방법을 찾던 중 공격성 짙은 암이 온몸으로 더 빠르게 퍼져 나갔다. 응급수술을 시작해 하루에 2차 수술까지 받은 백 대표는 중환자실에서 숨이 멈추기도 했다. 장 유착과 십이지장 전이가 의심돼 세 번째 수술까지 하게 됐다. 몸무게가 30kg 넘게 빠졌고 힘이 없어 먹는 것은 물론 움직이는 것도 힘들었다.

"특히 밥 냄새에 구토가 나왔어요. 제대로 밥을 먹지 못하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문득 한국농수산대학 동기들이 생각났어요. 몇몇 동기들에게 연락했습니다. 전국 10여 개 지역에서 농사지은 쌀들이 집에 도착했어요. 유독 성주에서 보낸 쌀은 거부감이 없었지요. 유황을 발효시켜 가을에 논에 뿌려 둔 곳에서 재배한 쌀이었습니다. 이때부터 밥을 먹기 시작했어요. 기적의 시작이었습니다"

 

동문들의 도움으로 기적처럼 살아나

그사이에 백기석이 죽어 간다는 소문이 동문들에게 퍼졌다. 전국 각지에서 온갖 농산물이 담긴 상자가 매일 집에 도착했다. 농산물의 특징과 복용법 주의사항 등을 살뜰하게 적은 메모와 함께였다. 하지만 먹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 먹지도 못하고 버리는 게 점점 많아졌다. 어느 날 썩어 가는 농산물을 보면서 '동기들이 나를 살리려고 힘들게 키운 농산물 보냈는데 버리면 안 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먹어도 아프고 안 먹어도 아픈데 먹고 죽자' 하는 마음으로 진통제를 복용해 가며 열심히 먹었다.

6개월이 지난 후 15㎏ 가까이 몸무게가 늘었다. 두 번째 기적이 일어났다. 보통 암 수술 환자들은 몸무게가 완전히 빠진 상태에서 평균적으로 6개월에 3~5kg, 1년이 지나면 10kg 정도 다시 살이 찐다. 백 대표의 경우는 논문에도 없는 사례였다. 일반적으로 암 환자들은 항암치료를 8회 정도 받는다. 백 대표의 경우는 무려 50번의 항암치료가 잡혔고 현재까지 33회를 마쳤다.

백 대표가 통증으로 힘들어할 때 가장 힘이 된 것은 가족이었다. 퇴원 후 6개월 정도 지났을 때 여동생이 오빠를 살리려고 발마사지까지 배워 왔다. 동생이 해 주는 발 마사지는 큰 효과가 있었다. 통증이 줄었으며 잠도 편히 잘 수 있었다. 동생의 사랑에 백 대표는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아들은 아빠, 엄마가 병원에 있는 날이 많아 잘 돌봐 주지 못했음에도 혼자 열심히 공부해 영재반 1등상과 경기도 교육감상을 받아 왔다. 어린 동생을 돌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백 대표는 지난날은 다 잊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 보자고 마음먹었다.

 

한국농수산대학은 생명이 생명을 낳는 '생명공동체'

현재 백 대표는 비장 절제로 면역 기능을 상실해 체온이 조금만 올라도 입원해야 하는 몸이다. 힘든 농사일은 할 수가 없어 새로 시작한 곤충테마파크에 관심을 쏟고 있다. 남는 시간은 원예치료 봉사 활동을 하면서 보내고 있다. 백 대표는 앞만 보고 달리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삶도 좋지만, 가족과 친구와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이 훨씬 원대하고 보람 있는 삶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가족의 힘도 컸지만, 동문들이 힘들게 키운 농산물과 함께 보내 준 메모가 저에겐 정말 큰 힘이 됐습니다. 제가 좋은 음식을 먹어서 살아난 것도 있지만, 그들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사랑과 관심이 저를 살린 것 같습니다. 한국농수산대학에 들어가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백 대표는 이 말을 꼭 써 달라고 했다.

"한국농수산대학 선배님들, 후배들, 사랑하는 우리 동기들! 우리는 생명을 다루는 사람들임을 항상 생각하고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뿌린 작은 씨앗이 나의 땀과 노력으로 건강하게 자라면, 그것이 누군가에게 건강한 먹거리가 되고, 더불어 건강한 삶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점에서 한국농수산대학은 생명이 생명을 낳는 생명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를 살려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일반 현황

나만의 성공노트

성공 노하우

계절에 맞는 작목을 선택하고 납품처에서 원하는 규격을 맞추기 위해서는 시스템에 따른 체계적인 관리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2월 초부터 초화를 심는 기업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4월에도 눈이 올 수 있으므로 내한성을 높여야 합니다.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으며, 품종의 선택부터 재배 기술까지 지난 15년간의 메모가 큰 도움이 됐습니다. 그렇게 품종별·시기별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 결과 일정한 품질의 꽃을 출하할 수 있게 됐고, 건강한 꽃들은 거래처와의 재계약으로 이어졌습니다. 덕분에 매출과 순이익이 크게 늘었습니다.

미래 계획

농장과 관련해서 노하우를 물어보면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는데, 다들 묻기 쑥스러운지 잘 안 물어봅니다. 그래서 그동안의 노하우를 블로그에 올리고 있습니다. 후배들이나 관심 있는 분들이 많이 활용해 주면 좋겠습니다. 몸이 달라진 만큼 삶도 달라졌으니 앞으로는 원예치료 봉사 활동을 포함해 제가 가진 기술과 정보를 많이 나눌 계획입니다.

경험자 조언

농업은 생명을 다루는 산업입니다. 그러므로 겸허해야 하며 교만하거나 우쭐대선 안 됩니다. 수많은 시행착오 앞에서 좌절하거나 꾀를 쓰지 말고 성실히 나아가다 보면 반드시 답이 나오게 돼 있습니다. 절대 서두르지 말고 즐거운 마음으로 일할 것을 권합니다.

 

청년농업인,

그것이 알고 싶다!

Q. 새로 시작한 곤충테마파크는 어떤 곳인가?

A. 나의 남은 인생과 함께할 곳이다. 현재 건물 두 동을 추가로 짓고 있는데, 한 동은 미래 식량자원으로 주목받는 식용 곤충 체험관이고 한 동은 나비 카페(가칭)이다. 꽃을 공부한 지난 기술을 살려 나비가 좋아하는 귀주식물을 연구하고 나비를 키우려고 한다. 1층에서 자란 나비는 1층과 2층을 잇는 투명 통로를 통해 2층 카페에서 날아다니게 할 계획이다. 카페 손님이 차를 마시면서 나비도 감상할 수 있도록 말이다. 나비가 날아다니는 공간에서 사람들이 차를 마시는 풍경은 생각만 해도 벅차다.

 

Q. 현재의 화훼 시장을 말한다면?

A. 문제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농장, 꽃집에서 꽃들의 이름을 마구 바꿔서 새로운 것처럼 팔고 있다. 예를 들어 200원에 팔던 사철채송화를 솔잎국화로 이름을 바꿔 300원에 팔고, 다음에는 송엽국으로 350원에, 지금은 비단세덤이란 이름으로 700원에 판다. 이 때문에 우리 농장에서는 시장에서 유통되는 이름 외에도 라벨을 학명과 영명으로 관리하고 계약서에도 명시한다. 어떤 일이든 잔꾀로 이익을 조금 볼 수는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다 같이 손해를 보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

 

Q. 화단용 초화 농장을 하면서 가장 큰 어려움이라면?

A. 납품 시기다. 큰 기업들의 경우는 보통 10월에 계약을 해서 이듬해의 납품 일정을 미리 잡을 수 있다. 하지만 관공서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2월에 계약하고 3월에 납품을 한다. 관공서의 입찰 시기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산품이 아닌 꽃을 오늘 계약하고 다음 주에 납품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관공서 납품 예상 수량을 미리 세우고 재배하지만, 계약되지 않아 팔 곳이 없어서 버리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몇 달씩 재배한 꽃들을 버릴 수밖에 없는 농민의 마음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이 인터뷰는 문화뉴스와 내일날씨가 공동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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