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리디아가 만나는 대한민국 최고예술가 100'은 오랜 문화예술계 및 방송 경력으로 다져진 그가 문화뉴스의 부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만들어진 특별한 코너다. 대한민국의 예술계를 이끌어온 아티스트들의 노고를 기리고 그들의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자 기획됐다. 어디에서도 쉽게 듣지 못하는 탑아티스트들의 진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박리디아는?]

[문화뉴스] "가장 말이 안 되는 거짓말을 말이 되는 것처럼 보여주는 게 우리 직업이다. 무대가 숨 쉬는 것처럼 느껴지면, 관객이 흥미를 느낄 수 있다."

국내에서 연극과 뮤지컬을 넘나들며 연출하는 드문 연출가를 소개한다. 극단 모시는사람들의 상임연출이자 뮤지컬 기획사인 쇼앤라이프의 대표이사인 권호성 연출가가 그 주인공이다. 약 3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다양한 작품을 연출해 화제에 오른 인물이다.

권호성 연출은 뮤지컬 '블루사이공'으로 1996년과 1997년 서울연극제 현대소나타상·연기상, 한국뮤지컬대상 희곡상,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대상·작품상·희곡상, 전국연극제 우수상을 받았고, 2002년엔 국회문화대상을 받았다. 또한, 2003년 초연된 연극 '오아시스 세탁소 습격사건'은 올해의 베스트 연극과 동아연극상 희곡상을 받기도 했다.

다른 일은 하지 않고, 오직 공연 연출에만 몰입하고 있는 권호성 연출을 만났다. 라이센스가 아닌 창작 공연을 고수한 사연, 자신만의 연출 코드와 '블루사이공'을 포함한 주요 연출작 뒷이야기, 그리고 현재 공연계에 바라는 점을 들어봤다.

 

   
 
문화뉴스가 선정한 '대한민국 최고 예술가 100인'에 선정됐다.

ㄴ 들어갈 자격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300명 안에나 들어갈 것 같은데, 선정해주셔서 감사하고 책임감도 느껴진다.

요즘 근황은 어떠한가?

ㄴ '윤동주, 달을 쏘다.' 작품이 끝나고 19일부터 2016 전북관광브랜드 상설공연으로 전북예술회관 공연장에서 뮤지컬 '성, 춘향' 작품을 연출한다. 현대적이고 요즘 젊은 세대의 관객들과 잘 만날 수 있는 트렌드 작품으로 꾸미려 한다. 김정숙 작가가 집필했고, 3년 전 처음 기획할 때부터 발전되고 있다.

오랫동안 공연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은 작품과 연출에 대해 잘 모를 수 있다. 자신의 대표작을 말해달라.

ㄴ 최근엔 '윤동주, 달을 쏘다.'가 관객들이 가장 친근감 느끼고 보러오는 공연이다. 그리고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은 '오아시스 세탁소 습격사건'이다. 극단 이름이나 내 이름을 몰라도 사람들은 그 작품을 들어봤을 것 같다. 2003년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공연 후 국립극장에도 올라가고, 그해 '올해의 베스트 연극', '동아연극상' 희곡상 등 받으며 2005년 대학로에서 상설공연을 했다. 지하에 있던 당구장을 개조해 100석 초미니 극장 만들어서, 중간에 바꾸긴 했지만 7년간 했다.

   
▲ 연극 '오아시스 세탁소 습격사건' 초연 홍보사진 ⓒ 극단 모시는사람들 홈페이지
100석 규모였지만, 7년 동안 33만 명을 동원했다. 신문에선 '대학로의 기적'이라고 기사가 나갈 정도였다. 창작 연극에서, 코미디 위주의 번안극이나 젊은 세대를 위한 뮤지컬이 주류로 변하는 곳에서 정통연극으로 인기몰이한 것이 언론에서도 주목한 것 같다. 이게 아마 일반 관객들에게 뇌리에 남을 작품이다.

중학교 검정 3~4개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얼마 전에도 박소담이 나오는 드라마 보니 '오아시스 세탁소 습격사건'을 공부하는 과정이 대사에 나와 재밌게 본 기억이 난다. 여기에 조카가 중학교 다닐 때, 삼촌이 연출한 작품이 교과서에 실려서 어깨를 폈다고 한 에피소드도 있다.

가장 많은 영예를 안은 작품은 '블루사이공'이다. 1996년 초연해서 이듬해 백상예술대상 대상을 받는 등 여러 상을 받았다. 나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이 있다. 여기에 한국형 뮤지컬 '카르멘'도 있다. 무대는 스페인이지만, 전체적인 작품이나 음악의 해석, 무대 오리지널리티를 한국적으로 가져가려 했다. 세계적으로 갈 작품이었는데, 제작사가 중간에 도산해 아쉽게 됐다.

창작 공연을 고수한 이유는 무엇인가?

ㄴ 어렸을 때부터 우리만의 아이덴티티가 있는 창작물에 대한 집착이 있던 것 같다. 연극을 처음 해도 창작이 없는 건 아니지만, 번역극 위주였다. 당시 소극장이 신촌에 많이 있었는데 '이대생을 겨냥 안 하면 성공 못 한다'라는 생각이 있어서 윌리엄 셰익스피어부터 테네시 윌리엄스까지 고전부터 현대극에 대한 번안극이 많았다.

1980년대에 대학교를 다녔지만, 창작극이라는 것이 거친 시대였다. 시대를 조망하는 연극이나 마당극, 이념극 들이 주류였던 시대였다. 많은 관객이 사랑한 작품이 번역극이어서, 연극을 선택하면서 "나는 어떤 연극을 할 것인가"라고 할 때 우리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을 콘텐츠(당시엔 콘텐츠라는 말이 없었다.)를 했으면 좋겠다고 봤다.

창작극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 봤다. 거의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연극만 했다. 번역 뮤지컬의 유혹도 많이 들어왔다. 하지만 내 길이 아니라 고사했다. 물론 후회도 됐다. 내가 더 쉽게 가지 않았을까? 하지만 재미가 없었다. 창작극 속에서 좀 더 재미를 찾은 것 같다.

   
 
공과대학을 먼저 다녔는데, 어떻게 연극영화학과로 진로를 바꾸게 됐나?

ㄴ 당시 학교 다니면 탈춤, 통기타, 장구를 못 치는 사람 없었다. 막걸릿집을 가던지, 서클을 가던지, 농활을 가도 그런 문화를 접하기 때문에, 고등학교 때까지 몰랐던 문화에 접하게 됐다. '이건 뭐지?'라는 호기심에 강한 끌림을 갖게 됐다. 그러면서 내가 재능이 있는 것 같았다. 이걸 평생 하면 인생이 재밌을 것 같다는 거룩한 사명감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다시 연극영화학과를 갔다. 전공을 1학년부터 다시 들었다.

앞서 여러 작품을 언급했지만, 대중의 성향과 상관없이 소중했던 작품 이야기를 해달라.

ㄴ 먼저 권호성의 연출을 좋아하는 몇 명 안 되는 마니아분들이 베스트를 꼽는다면, '몽연'이 있다. 꿈 몽(夢), 그리워할 연(戀)의 의미다. 우리의 현재와 사는 삶, 그리고 죽어서 우린 어디로 가는가, 사후는 어떻게 되는가를 함축적이고 시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페스티벌에 출품되기도 했다. 낯선 외국 관객에게 했던 느낌이 강렬했다. 우리의 언어나 문법이 외국에서도 충분히 그 이상으로 통하는구나 생각했다.

   
▲ 연극 '몽연' 공연 모습 ⓒ 극단 모시는사람들 홈페이지
두 번째는 뮤지컬 '들풀'이다. 동학혁명 100주년 기념작품으로 1994년에 올렸다. 내가 연극을 선택하게 된 계기가 '들불'이다. 나는 연출가이지만, 작곡도 하는 음악가이기도 하다. '동학농민가'를 작곡한 적이 있다. 386세대나 운동권세대는 아는 곡일 것이다. "붉은 노을 한울에 퍼져 핍박의 설움이 받쳐"라는 가사가 있는데, 당시 동학에 관심이 많았다.

창작극에 관심이 많았던 만큼, 우리 사상이나 종교에도 관심 많았다. 그때 발견한 보물이 동학이었다. 천주를 모신다는 뜻인 시천주가 근본사상으로 하는데, 하느님이 내 안에 있다는 사상이다. 부처가 내 안에 있다에서 출발해 이렇게 우리나라에 멋진 종교 철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동학전적지와 사적지 답사를 다녔다. 그 와중에 금구, 원평으로 가는 달밤 황톳길을 걸어가며 영감을 받아 '동학농민가'로 만들었고, 뮤지컬로 이것을 만들면 어떠냐는 생각이 들었다. 1984년 당시 생각이었고, 1985년 나는 연극영화과로 들어가게 됐다. 그래서 10년을 준비했다.

김정숙 작가와 함께 다듬어서, 연강홀에서 온 사재를 다 털어서 했지만, 쫄딱 망했다. 하지만 극단 모시는사람들의 많은 사람이 다시 보고픈, 다시 올려야 할 공연 넘버원으로 해서 다시 올려달라고 했다. 결국, 120주년인 재작년에 '들풀2'를 과천시민회관에서 감동적으로 올렸다. 물론 돈이 없고, 마케팅 능력도 없어서 길게는 못하고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 함께 10일간 했다. 동학농민군을 위한 한풀이 한마당 굿판을 벌인 것 같다.

   
▲ 뮤지컬 '들풀 2' 포스터
세 번째 작품은 '블루사이공'이다. 과거 정부의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는 의미로 "공연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인터뷰했는데, 다시 필요로 하는 세상인 것 같다. 중동 난민, IS 문제, 중국과 일본 틈바구니에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전쟁의 소용돌이, 그리고 어떠한 국가관과 통일관을 가져야 하는가 등 젊은이들이 깊게 생각하길 꺼리지만 누군가는 꺼내야 한다고 본다.

단순히, 수입 뮤지컬만 할 것이 아니라, 좀 더 현실적이고 냉정한 것을 공연계에서도 제시해야 한다고 본다. '블루사이공'은 지금도 문제점을 던질 작품이다. 요즘 들어서야 한국 군인이 베트남에서 양민 학살했다고 이야기가 나오지, 1996년 공연 당시엔 국군 전우회 500명 정도가 극장을 둘러싸며 시위했다. "너넨 반역 단체다. 너희가 반공, 민주주의, 전쟁을 알아"라고 외치는 사이에 무섭게 올렸다.

내 아버지가 군 장교 출신인데,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 고엽제 판정을 받으시기도 했다. 당시 '블루사이공'을 올렸을 때, 아버지는 공연 보시고 딱 한마디를 하셨다. "이 빨갱이 새끼야"하고 내 작품을 다시는 보지 않았다. 물론 보긴 보셨다. 한 10년은 보시지 않았다.

이 작품은 한국 최초로 국군의 양민 학살과 파병 당위성에 대한 근원적인 이야기를 제시했다. 지금까지 베트남 전쟁하면 미국인의 입장 혹은 김추자의 국책가요인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가 대표적이 있다. 김 상사를 희화하면서, 신나는 리듬 속에 우리의 전쟁 파병을 정당화했다. 지금 그 김 상사가 어떻게 되었는가?

   
▲ 뮤지컬 '블루사이공'의 마지막 공연 포스터.
주인공 '김문석' 상사는 고엽제 후유증에 시달려 죽어간다. '시계(視界) 청소'를 해야 하는데, 화염방사기가 위험해 고엽제를 뿌린 것이다. 여기에 워낙 모기도 많고, 벌레가 많으니 고엽제를 철모를 퍼서 바르기도 했다. 사실 다이옥신인데, 고엽제는 그 중독성이 강해 유전도 된다. 그래서 귀국 후 낳은 딸도 뇌성마비가 걸려 말로 못 하는 아이가 된다는 현실을 담고 있다.

'블루사이공'의 첫 장면은 휠체어를 타고 나오는 말 못하는 '김 상사'의 13살 딸이 "어버버" 하면서 등장한다. 아버지는 애를 돌볼 힘이 없고, 딸은 도망을 다니기 때문에 끈으로 서로를 묶었다. 여기에 베트콩들과 어이없이 죽어간 병사들이 등장해 노래를 부르며 시작한다. 당시 양민학살에 대해 관객들은 그야말로 자지러졌다. 다시 올리면 가장 큰 반향을 일으킬 것이다.

작품에 고스란히 본인의 가치관과 신조가 느껴진다.

ㄴ 전부 그런 건 아니다. 세탁소에 종교가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웃음) 일반적 프로덕션이나 제작사 측에서 권호성 연출은 역사, 창작극, 무게감 있는 작품을 선호하는 것 같다는 인식이 있어서 계속 그런 작품에 섭외가 오니 간 것도 있다. 재밌는 작품도 좋아하고, 계속 만들고 싶어 한다. 어떤 장르를 꼭 구분한 스타일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내가 선호하는 것과 거부하는 것이 있다는 점이다. 내 기준점에서 벗어난 것이 있다. 지나치게 얕은 상업성으로만 흐르는 것은 피한다. 재밌고, 코미디를 좋아하지만, 너무나 얄팍하게 대중들의 심리를 파고드는 작품을 하지 않으려 한다. 내가 가진 기본적인 가치관에 좀 더 부합된 작품을 하려 하는 데 편하다. 만들면서 재미도 있다. 억지로 하기 싫은 걸 하면 체하는 것과 같다.

   
 
우리나라 연출가 중에 뮤지컬과 연극을 자유스럽게 연출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ㄴ 아무래도 작곡을 할 줄 알면 유리한 게 맞다. 뮤지컬은 음악이 중요하다. 첫 번째가 음악이고 두 번째가 드라마다. 물론 순서가 바뀔 수 있다. 하지만 음악이 가진 리듬이 관객과 숨 쉬게 만들어야 한다. 그냥 음악만 생각나는 것은 좋은 뮤지컬이 아니다. 음악을 느끼면서 내가 음악 속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줘야 한다.

그래서 음악의 흐름을 탈 수 있어야 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악보만 보고 박자나 음표에 의해서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드라마 적으로 해석해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음악을 알고 가는 것이 유리하다. 대부분 연극을 잘하는 분이 뮤지컬에서 실패한다면, 음악을 간과한 부분이 크다. 드라마로만 승부하고, 음악을 곁다리로만 보면 실패할 수 있다.

황금비율이 있다. 그건 경험적으로 나오는 거라, 과학적으로 말할 순 없다. 관객과의 싸움이다. 늘 후배들에게 말하는 게 뮤지컬은 과학이다. 연극처럼 개인적 영감, 해석으로 관객에게 주장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관객과의 호흡에서 끌어내는 것이 있기 때문에, 황금비율을 따라가려면 영감이 아니라 과학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말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음악을 알고 하면 이해하기 쉽다.

'질 좋은 다작'을 연출하는 비결은 무엇인가?

ㄴ 나는 생계형 연출가다. (웃음) 연출 외에 다른 건 하지 않는다. 다른 분들은 교수를 한다거나,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나는 연출만 가지고 먹고 산다. 그러니 절박하다. 하나만 잘해야 한다. 제작자에게 밉보여 다음 작품에 잘리면 안된다. 나에게 어울리는 작품에 콜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미덕이다. 연출만 하니 24시간 작품만 생각하게 된다.

 

   
 
결국, 자신만의 코드가 있는 것 같다.

ㄴ 어느 순간 이 일을 하지 않았으면, 내가 뭘 했을까 생각하니 재밌었다. 연극은 어떻게 보면 가장 프로페셔널한 거짓말이다. 그 인물과 일체가 되어야 연기를 한다고 하는데, 대부분 연기자가 그렇게 되긴 힘들다. 내가 A 역할을 하는 것이지, 내가 A를 완벽하게 표현하면 '빙의되는 것'이다. 그게 유토피아인지도 모르겠다.

가장 말이 안 되는 거짓말을 말이 되는 것처럼 보여주는 게 우리 직업 같다. 연기자들에게 하는 이야기가 있다. "살아있다", "죽어있다"는 말을 하는데, 그게 몸일 수도 언어일 수도 있다. 공통분모가 있다. 숨, 생명력이다. 무대에서 배우가 숨을 쉬면 살아 있는데, 숨 쉬지 않는 것처럼 느끼면 죽어있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받는 가운데 인물이 풀리고, 스토리가 풀리는 경우가 많다. 인물이 숨 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던지면 살아난다. 화술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그 사람이 그 사람답게 하는 소스들을 더 찾아 입히는 작업을 하는 경우가 있다. 무대에서 숨 쉬는 것처럼 느껴지면, 관객이 흥미를 느낄 수 있다. 큰 숨이 만들어져 움직이는 기류가 관객을 움직인다.

내 호가 순홍이다. 순수할 순(純), 붉을 홍(紅)이다. 국악인 박애리 씨가 지어준 것인데,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뜻이다. (웃음) 나중에 생각해보니 마음에 든다. 새빨간 거짓말로 무대의 호흡을 끌고 갈 수 있다면, 제대로 된 호일 것이다.

   
▲ 지난달 재연된 '윤동주, 달을 쏘다.' 포스터
그래서 역사를 조명한 작품이 많은가?

ㄴ 내가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매우 많다. 사람을 보는 것처럼 재미난 게 없다. 배우들과 같이 작품을 풀어나갈 때, 인물제시를 잘하는데, 그 인물제시가 적합할 때가 많다. 이러한 사람에 대한 관심, 애정이 내 연극에 작용하는 것 같다. 역사 속 인물을 많이 다루니 그것도 연장선에 있다.

'윤동주, 달을 쏘다.'가 이번이 세 번째 정식 공연인데 답답했다. 윤동주가 보일 듯 안보였다. 그래서 1월 말에 용정으로 갔다. 윤동주가 살던 고향을 가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하늘을 보고 싶었다. 많은 느낌을 공연에 그대로 옮길 순 없었지만, 가길 정말 잘했다. 또 다른 윤동주를 악수하고, 그 발자국을 느낄 수 있었다. 대본을 보고 자료를 다시 보는데, 중학교, 생가, 교회 운동장 등 동네가 싹 그려졌다. 그러다 보니 작품을 푸는 지도를 갖게 됐다.

연출가 권호성에게 가장 영향을 준 연출가는?

ㄴ 오태석 선생님께 젊었을 때 많은 영향을 받았다. 연극을 몰랐을 때, 오 선생님의 연극을 보면 뭔지 몰라도 멋졌다. 이해하기 힘든 것도 있긴 하다. 오 선생님 가진 연극성(연극적 특수성)이 있다. 그런 미학이 가능하구나 생각하며, 미장센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권호성에게 무대란 어떤 곳인가?

ㄴ 숨 쉬는 곳이다. 무대를 바라보고, 만들고 있다. 그래야 내가 있다. 그걸 떠나면 내가 살 게 없다. 그래서 숨 쉬는 곳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권호성은 어떤 연출가였으면 좋겠나?

ㄴ 건강한 연출가였으면 좋겠다. 힘과 정신이 모두 건강해야 한다. 건강하면 끝까지 추진력이 있다. 관객과 줄다리기에서 끝끝내 버텨낼 수 있다. 건강하지 못하면 스태프와 타협하고, 배우와 용인하게 된다. 그래서 끝까지 건강했으면 좋겠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ㄴ 요즘은 연출의 시대가 아니라 프로듀서의 시대인 것 같다. 연출이 최고인 줄 알았는데, 지금 연극을 알았으면 프로듀서를 했을 것이다. 이야기를 왜 꺼내냐면, 연출이 무시되는 시대다. 연출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는 문화적으로 비전이 없다. 제작사의 횡포가 심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경험이 쌓여서 뭔가 해볼 만한 연출가에게 투자하지 않는다.

젊고, 제작사의 요청을 잘 따르는 연출가들에게 작품이 선행된다. 그러다 보니 작품이 자꾸 얕아지고 가벼워진다. 가벼운 작품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관객과 대화할 수 있는 작품이어야 하는데, 대화가 없다면 작품이 천박해진다. 연출로 화가 날 때가 갈수록 많아진다.

연출은 창작자이지만, 해석을 우선하는 직업이다. 미술가와 극작가는 세계를 그린다. 세상을 그리면 그려낸 세상을 해석한다. 똑같이 해석할 수 있지만, 다른 해석으로 더 좋아질 수 있다. 해석할 시간의 여지를 이 사회를 주지 않는다. 일방적으로 PD가 원하는 배우나 스태프가 있어서 점점 더 가벼워지니 고민이 깊어진다.

30대 때처럼 일단 저지르고 죽도록 빚을 갚는 건 체력적 힘들다. 그래서 연출가로 살아남기 위한 작업을 할 것이다. 2~3년만 두고 보면 내가 가는 길이 세계관에서 벗어나진 않겠지만, 다른 모색을 할 수 있을 거라 본다. 새로운 것을 얻으려면 무언가를 놔야 하는데 그걸 놔야 할 때가 오지 않았는가. "이거다"라고 결정되면 좀 놔야 할 것이다. 타성을 놓고, 진짜 남은 인생에서 이거 하나면 꼭 해야겠다는 것이 정해지면 실현하겠다.

▲ 권호성 연출이 독자들에게 인사말을 남겼다.

[글] 문화뉴스 박리디아 (Lydia Park)_본지 부사장 golydia@mhns.co.kr
[정리] 문화뉴스 양미르 기자 mir@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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