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뉴스 MHN 서정준 기자] 뮤지컬 '레드북'의 작가 한정석을 만나다.

오는 30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공연되는 뮤지컬 '레드북'은 '슬플 때마다 야한 상상을 한다'는 엉뚱하지만 당당한 안나와 고지식한 변호사 청년 브라운이 펼치는 로맨틱 코미디다. 아이비, 유리아, 박은석, 이상이, 지현준, 홍우진, 원종환, 김국희, 윤정열, 안창용, 김승용, 허순미, 정다희, 황두현, 김상균, 이다정, 김우석이 출연한다.

 

뮤지컬 '레드북'은 여성혐오라는 개념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요즘의 세대와 맞물려 트라이아웃 때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한편으론 여전히 남성 중심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기에 진정한 여성 중심의 작품이라고 할 수 없다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하는 등 취향에 따른 호불호를 넘어 모두들 주목하는 작품으로 거듭났다.

요즘처럼 특정 작품에 대한 비판과 반박이 '개취(개인의 취향)'라는 말로 뭉뚱그려지는 시대에도 그게 가능한 이유는 '레드북'이 가진 높은 완성도 때문이 아닐까. 지난 2월 22일, 그 기반이 되는 튼튼한 대본을 쓴 한정석 작가와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 한정석 작가

어떻게 뮤지컬 작가의 길을 걷게 됐는지 궁금하다.

ㄴ 문예창작과를 나왔지만 서사를 다루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그냥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했고 뭐가 맞을까 해서 드라마, 동화, 시, 소설, 광고 등 다양한 분야를 배우면서 내가 뭘 할 수 있나 하고 관심가진 와중에 뮤지컬도 그중 하나였던 거죠. 그러다가 제가 다닐 때 학교에 뮤지컬 공모전 같은 게 있었는데 입상 특전이 교육 프로그램 이수였고 그걸 하면서 좀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죠. 거기서 만난게 (이)선영 작곡가에요. 그래서 과제로 이런저런 작업을 하면서 친해졌어요. 저는 그후 습작을 계속 했고 선영 작곡가는 음악조감독으로 활동하다가 제가 '이제 좀 써볼까' 해서 '여신님이 보고 계셔' 트리트먼트 완성할 때쯤 CJ크리에이티브마인즈에 냈던 게 8, 9년 전이에요.

작곡가와 함께하는 작업은 어떤가. 일반적으로 글은 '혼자 쓰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실제로도 그런 편인데 두 명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게 쉬운 과정은 아닐 것 같다.

ㄴ 저희는 제가 쓰고 작곡가가 검토하고 그걸 주고받으면서 하나의 넘버를 완성하는데 처음 교육 프로그램에서 만났을 때부터 취미처럼 가볍게 노래 하나 써볼까? 하면서 우화나 설화로도 써보고 일반 가요 같은 것도 써보며 파트너쉽과 취향을 알아갔죠. 놀면서 테스트해갔기 때문에 큰 걱정은 없었고, 같이 쓰는 부분이지만 그 안에서 철저하게 분리되는 부분, 믿고 존중하는 면이 있거든요. 이선영 작곡가와는 그걸 서로 요구하지 않아도 그냥 운좋게 맞은 게 아닐까 싶어요. 다른 파트너랑도 해봤지만 이 친구와 작업하며 느낌이 달랐던 게 있거든요.

서사를 다루고 싶다고 했지만, 뮤지컬 작업만의 장르적인 특징이나 음악 위주의 서사를 만드는 게 어렵진 않았는지.

ㄴ 음악에 할애하는 시간이 많다 보니 작가가 담을 수 있는 드라마가 무척 적어요. 드라마적으로 이야기를 하면서 끌고 가기엔 훨씬 더 압축되야 하는 장르란 걸 배우고 있어요. 너무 복잡하거나 너무 많은 이야기는 매체에 맞지 않는 것 같지만 감정적으로 설득하거나 공감을 이끌어내거나 하는 면에선 엄청난 강점이 있죠. 이야기를 쌓을 때도 뮤지컬의 특성에 맞는 스타일로 다듬는 작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뮤지컬 '레드북'을 보면 탄탄한 이야기 구조가 인상적이다. 단역 하나 놓치지 않는 매끄러움을 지닌 반면, 최대한 친절한 스토리텔링을 한다는 느낌이다.

ㄴ 작품을 만드는 기준은 저나 (이)선영 씨인거 같아요. 저희는 뮤지컬을 쓰는 사람이지만, 뮤지컬만 보진 않아요. 드라마나 티비도 보죠. 대중은 다른 장르에 익숙하니까. 이야기의 완결성을 기대하는 부분이 뮤지컬 보는 사람들에게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런 서사가 중심이 되는 '북 뮤지컬'을 추구하는 것 같아요. 그게 우리가 볼 땐 재밌다는 생각이 드는 거고요. 난해하거나 실험적인 것보다는 뮤지컬에는 많은 예산과 인원이 필요하기에 검증된 구조를 더 많은 사람들이 즐길수 있는 작품을 추구하는 것 같아요.

'여신님이 보고 계셔'와 '레드북' 다른 작품들보다 장소 이동이나 서사의 흐름에 따라 암전이 많은 편이다. 본인의 스타일인지, 또 본공연에 오며 변한 점도 있는 건지 궁금하다.

ㄴ 특별히 제 스타일이라고 하긴 어려운 것 같아요. 대본 상에 (암전) 이렇게 다 써놓거나 한 건 아니거든요. 공연을 실제로 무대에 올리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것들이에요. 튀거나 집중이 흐트러지는 부분이 있다면 좀 더 매끄럽게 완성도를 높이는 면을 많이 신경 쓴 것 같아요. 트라이아웃에서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면 이번엔 그런 면을 신경쓴 것 같아요. 일단 극장 자체가 단차가 낮고 시야가 안 좋은 것도 있어서 그걸 해소할 수 없다면 다른 면을 보완하면 좋겠다는 것도 있었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쉬운 게 있어요. 아, 음악적인 건 무척 꼼꼼하게 짜요. 큐대사가 뭐고 어디부터 어디까지고 그런 것에 비해 무대는 극장 컨디션이나 디자인 등에 따라서 바뀌는 부분이 있던 것 같아요. 이번에도 처음 계획과도 달라진 면이 있거든요.

▲ 존슨 (배우 원종환)
▲ 로렐라이 (배우 홍우진)

앞서 말했듯 '레드북'은 친절한 서사 구조가 돋보이는데 등장인물들의 이름도 그런 것 같다. 존슨부터 시작해서 바이올렛, 안나, 브라운, 로렐라이 등 상징적인 이름이 많아 보이는데.

ㄴ '안나'는 관객분들 아시다시피 흔한 이름이라서 골랐어요. '레드북'은 그 시대의 특별한 이야기지만, 지금의 익숙한 인물의 이야기일 수도 있거든요. 우리(제작진)끼리 아는 성은 '노크'에요. 그 시대를 두드리고 제안하는 인물을 담았죠. '브라운'이나 '바이올렛'은 '레드'라는 색깔의 영향을 받은 컬러라고 생각했고요. 조연들은 향신료나 차, 소스 등의 이름을 썼어요. 원래는 영국 이름 사전을 보고 했는데 이름에서 특별히 다른 이미지가 떠오르거나 하면 작품의 집중이 흐트러지더라고요. 무시할 수 있는 이름이면 괜찮은데 에드워드, 로버트, 이렇게 들어가면 내가 아는 누군가가 떠오르면서 오히려 집중이 흐트러지겠다 싶어서 오히려 직관적이고 가볍게 들을 수 있는 이름을 썼던 것 같아요. '로렐라이'는 독일 전설인데 기존의 어떤 상징적인 이미지를 드러내는 이름인 것 같아서 그걸 전복시키고 새로운 이미지를 부여하는 캐릭터로 만들고 싶었어요. '도로시'는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이름인데 '오즈의 마법사'는 여성 리더가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모험을 담은 상징적인 이미지여서 그런 이름을 붙이고 싶다는 면이 있었어요.

브라운과 안나 등 매력있는 캐릭터가 많은데 작가를 대변하는 인물이 있다면 누구인가.

ㄴ 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브라운을 닮았다고 해주시고 저를 아는 사람은 안나같다고 말씀하세요. 내가 내 이야기를 밝히고 주장하고 싶어하는 반면 나의 부족한 면 등에 대해서 성장하고 싶고 변화하는 마음도 있거든요. 양가적으로 제 내면이 인물들에게 좀씩 녹아든거 같아요. '여신님이 보고 계셔'에서도 제가 공감하고 이해하는 면을 인물들에게 녹여내려고 했거든요. 제가 쓰는 인물의 상당부분은 제가 이 말이 무슨 의민지 알 것 같고 왜 이러는지 알 것 같은 걸 쓰는 편인 것 같아요.

▲ 안나는 손가락질 받으면서도 '티없이 맑은 시대에 새까만 얼룩을 남겨' 끝끝내 자신으로 일어선다.

뮤지컬 '레드북'은 작년 트라이아웃 때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왔다. 창작 뮤지컬에선 특히 보기 힘든 여성 중심 서사를 재밌게 풀어냈는데 정작 작가 본인은 프레스콜 때도 그렇고 '의도한 건 아니었다'고 했다. 의도는 뭐였나.

ㄴ 3년 전만 해도, 정말 (이런 분위기일 거라고)상상을 못했죠. 이야기 구성은 빨리 끝났어요. 지금 줄거리는 그때랑 똑같거든요. 그때는 제가 이런 걸 쓰는 거에 대해서 리뷰하는 분들도 여성 관련된 이야기를 이야기한다고 연결짓지 않는 느낌도 있었어요. 그런데 점점 여성 중심 서사 등에 대해 문제 제기되면서 저도 '어? 내가 쓴게 페미니즘이었구나' 했죠.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인간의 태도에 대한 게 결국 시기와도 연결된 거구나. 싶어서 이야기를 계속 점검하고 확인했던 것 같아요. 우연인 거같다고 생각도 들지만 남자인 제게도 어느정도는 무의식 중에 문제의식이 있었으니까, 여자들은 얼마나 심했겠어요. 제가 쓰긴 했지만, 그런 의식들이 알음알음 모여서 간거니까요. 하지만 여전히 '페미니즘'이나 '여성혐오' 등 만을 이야기하려던 건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인간 본연의 본질적인 부분을 담으려고 했던 거 같아요. 주인공이 '안나'니까 여성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약자, 소수자의 이야기도 담으려고 했고요. 조금 다른 사람이 겪는 부당함들. 그리고 그걸 어떻게 우리가 인지하고 해소할 수 있는가. 그런 누구나 가진 이야기를 담아내려고 했기 때문에 지금 시대를 반영하는 걸로 비춰질 수 있는 것 같아요. 가장 큰 목표는 '정답이 정해졌다고 믿는 사회에서 자기만의 답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였거든요.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더불어 살아가는가 하는 거죠. 그 과정에서 문제를 자각하고 변하는 사람도 있고요. 저는 그래서 '안나'뿐 아니라 '브라운'의 이야기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내 기준이나 사회 기준에서 다르다고 생각한 사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를 통해 내 문제를 자각하고 성장하는 사람의 롤모델이 필요하지 않나 했어요. 문제가 있을 때 거기에 부딪혀 싸우는 사람의 이야기는 많이 봤다면 그걸 옆에서 보면서 변화하고 성장하는 인물의 모습도 좀 제시되면 어떨까 싶었죠.

'여신님이 보고 계셔'는 전형적인 '여신'을 내세운 이야기라면 '레드북'은 정반대의 느낌을 갖고 있다. 작가 역시 '레드북'의 브라운처럼 그런 면에 대해서 깨닫고 변화한 것인지.

ㄴ 특별히 그렇게 생각하진 않아요. '여신님이 보고 계셔'에서도 '여신'이란 존재를 해체하고 싶었거든요. 순호 외에는 다들 각자의 여신을 찾아가는 모습을 그려내고 싶었거든요. 오히려 신성화되지 않는 존재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늙은 어머니나, 아빠까지 등장시켜서 여신이 갖는 전형성을 희석하고 다양한 인물을 찾아주고 싶다는 생각이었어요. 다만 그 안에서 여신이 대상화되는 부분도 있기 때문에 전형적인 '성녀' 이미지로 비춰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처음 의도는 좀 더 다양한 '여신'을 제시하고 싶다는 의도가 있었어요.

▲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 계셔'

뮤지컬 '레드북'으로 또 다시 호평받고 있다. 그런데 2013년 이후 두 번째 작품이다. 작업속도가 느린 편이 아닌가 싶은데.

ㄴ 자기관리 하는 법, 분량을 얼마나 소화할 수 있는지 등등 이런 것도 사실 데뷔하고 파악한 게 많아요. 그래서 데뷔작 이후로 쓰는데 점점 오래 걸리고 조심하게 되는 거 같아요. 그래서 오래 걸리지만 그런 만큼 조금씩 더 배워가고 있죠. 예전엔 일을 받았는데 마감을 늦추거나 하는 경우도 생겼다면 지금은 아예 안 받거나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려고 하는 편이에요. 다작을 하지 않는 이유기도 하고요. 4년이 걸린 게 1년 버티고 1년 쓰고 그런 식이라고 보시면 돼요(웃음).

2013년과 비교하면 작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창작지원 프로그램 등이 점점 늘고 있다. 물론 그래도 아직은 부족한 게 현실인 것 같다.

ㄴ 그런게 좀 있어서 많이 좀 좋아지고 경쟁력 있는 창작자들이 생기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건 다행인 거 같고 그러나 그들이 다음 작품을 계속 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공모전 등을 통해서 데뷔는 빠른데 그 과정에서 실망하고 이 판을 떠나는 사람들도 많거든요. 창작뮤지컬 하는 창작자가 많지도 않고, 적은 금액과 짧은 기간을 주고 좋은 퀄리티를 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면 죄인이 되는 구조에 놓여 있어서 작가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내세우기 힘들어요. 저희는 어쨌든 '여신님이 보고 계셔'란 히트작이 있지만, 그렇게 먹고살기 편하지도 않고 계속 다른 일로 돈을 벌어서 충분한 기간을 갖고 작품을 만들기에 그나마 관객들께서 조금 더 좋게 봐주시는데 실제로는 몇 달 안에 작품을 만들어서 올라가는 경우도 있거든요. 사실 둘이 쓰면 빠른 게 아니라 오히려 시간이 걸리는데 그런 인식이 아직 제대로 정착되진 않았죠. 콘텐츠, 대본과 음악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면 투자를 해야한다고 생각해요.

 

작가 지망생에게 조언을 하나 한다면?

ㄴ 개인마다 받을 수 있는 수많은 문제(계약, 상황, 시스템 등)가 어떻게 닥칠지 몰라서 쉽게 말씀드릴 순 없는 부분이에요. 하지만 그런 상황을 좋게 만들고 싶어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움직이나 흐름이 제 주변에는 확실히 있는 거 같아요. 아직까지 '살기 좋은 뮤지컬로 오세요~'라고 할 순 없지만, 그런 변화를 좀 더 기대하고 그런 혼란스러움을 겪더라도 같이 만들 의지가 있는 분들이라면 도전하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최근 공연계를 사랑하는 관객들에게 힘든 시기다. 살짝 응원이 될 수 있는 이야기를 해준다면.

ㄴ 저희는 이걸 쓰면서 좀 오그라드는 이야기지만 우리가 듣고 싶어하고 우리 안의 약한 부분에 대해서 말하려 했어요. 저나 (이)선영 씨나 누구에게나 사회적으로 단점으로 평가받는 부분, 마이너리티한 부분, 컴플렉스 등이 있을 거에요.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를 혼란스러워했던 시간도 있었고요. 그래서 이걸 쓰면서 우리의 허울이나 단점, 부족한 면을 어떻게 바라보고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해서 떠올리며 많이 힘을 얻은 것 같아요. 자기 안의 수많은 면이 있는데 그 안의 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어떻게 내보내야 하는가를 고민하며 쓴 작품이니까 보시는 관객분들께 그런 마음이 전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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