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뉴스] "연극을 우연히 시작했다 하지만, 정말 '대가' 밑에서 시작했다. 큰 행운이었다."

'천만요정' 오달수의 연기 인생 출발점은 연극 무대였다. 그리고 영화처럼 극적이었다. 1990년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소극장에 인쇄물 배달을 갔다가 극단 연희단거리패에 들어간 것이었다. 이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인 스승 이윤택 연출의 지도로, 오달수는 그야말로 일취월장했다.

약 10년이 흐른 후, 오달수는 우연히 영화를 소개받으며 영화배우가 됐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를 통해 관객들에게 존재감 빛나는 조연배우로 나타났고, 이젠 그가 출연하는 영화는 '천만 영화'가 됐다. 지난해 '국제시장', '암살', '베테랑'의 천만 돌풍엔 모두 오달수가 있었다. 실제로 역대 한국 천만 영화 13편 중 무려 7편이 그가 등장한 작품이다.

이러한 그의 '성공 스토리'는 가난한 무명 연극배우가 꿈을 이루기 위해 영화배우에 도전한다는 영화 '대배우' 속 '성필'의 사연과 비슷하다. 오달수는 이 작품으로 생애 첫 주연 자리에서 관객을 만난다. 그래서 혹자는 "과연 조연인 그가 주연을 맡으면 얼마나 되겠는가"라는 우려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달수를 실제로 만나니 그런 우려는 사라졌다.

25일 오후 종로구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대배우' 오달수를 만났다. 30일 개봉하는 영화 '대배우'를 위해 언론 매체와 3일째 라운딩인터뷰를 하고 있는 그는 "긴장도 많이 했지만, 이젠 한 시름 놨다"며 입을 열었다. 오달수에게 작품 이야기와 더불어 작품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연극 이야기를 물어봤다. 현재의 오달수를 만들어 준 스승 이윤택 연출부터 이른바 '대학로 연극 위기'에 대한 생각도 들어볼 수 있었다.

 

   
 

어제(24일) JTBC '뉴스룸' 인터뷰를 했다.

ㄴ 손석희 앵커께서 사람을 편하게 해주려고 노력을 많이 해주셔서 감사했다. (실시간 검색어에도 올랐다) 여기만 3일째 계속 있어서 그건 몰랐다. (웃음)

'첫 주연작'이어서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 영화 보면서 느낌이 어떤가?

ㄴ 첫 주연 영화를 찍으면서 책임감, 부담감을 감독님과 함께한다는 그러한 점이 아직까진 내가 부족한 것 같아 걱정을 많이 했다. 촬영할 때부터 처음 영화를 본 언론 시사회까지 걱정됐다. 기자분들이 전문가이지만, 관객이라고 생각하고 엔드크레딧 올라갈 때까지 고민도 많이 하고, 몸도 아팠다. 자고 일어나 전날 본 영화에 대해 생각을 했고, 부담감은 이제 많이 내려놨다. 첫 주연인데 잘 나와야 될 텐데 성과물은 관객분들의 몫이다. 영화가 잘 나왔다, 안 나왔다가 아니라 '편안한 영화' 한 편 보고 이젠 한 시름 놔도 될 것 같다.

조연으로 두각을 보이다가, 주연으로 입지를 굳히면 계속하게 된다. 향후 계획은 무엇인가?

ㄴ 다시 조연으로 돌아가 '마스터'로 4월 말 촬영을 시작할 것이다. (웃음)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주연과 조연은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다. 영화라는 것을 몽타주로 보통 이야기한다. 씬과 씬이 다 이어져서 하나의 영화로 완성된다. 하나의 씬 안에 그 씬의 주인공이 따로 있다. 그러므로 조연과 주연보단 '씬의 주인공'이 주인공이다. 그 씬의 목표에 대한 역할을 정확히 하는 것이 진짜 주연이다. 그런 면에서 큰 의미가 없다.

 

   
 

작품 속에선 "연극을 하다가 더 성공하기 위해서 영화로 간다"는 말이 강조된다. 실제로 어떠한가?

ㄴ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든, 무대 위에서 관객들과 직접 만나 연기를 하던 연기자는 연기자다. 성공에 관한 이야기도 그렇다. 연기자로 얼마만큼 관객들에게 정확하게 '대변자'로 전달했는가, 얼마만큼 잘했는가가 중요하다. 물론 영화는 좋다.

영화를 처음엔 "아르바이트 삼아 한다"고 말한 적도 있었고, 영화를 '직장'으로 표현한 적도 있었다. 한 해 한 해 보니 영화를 한지가 벌써 15년 정도 됐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아르바이트가 아닌, 직장도 아닌, '영화배우'로 사명감을 가져야 하는 그런 시점이 훨씬 지났다고 생각한다. 연극배우든 영화배우든 둘 다 큰 의미가 된다. 연기를 연극으로 시작해, 15년 이상 영화를 할 수 있게끔 됐으니, 둘 다 큰 의미가 있다.

연극을 하다가 영화를 한 배우 중에 "내가 배신자가 됐다는 느낌도 들었다"고 인터뷰를 한 배우도 있다.

ㄴ 어떤 기분으로 하신 말씀인지 알겠다. 연극배우의 프라이드가 강하기 때문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영화가 지금처럼 부흥하기 전인 1940~50년대 이전으로 더 올라갈 수 있는데 '신극'이 처음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때부터다. 그 당시 배우들의 프라이드는 비록 굶더라도, 길에 나갈 때 아무리 배고프더라도 정장 차림으로 나오며 '내가 배우다'라는 것이 있었다. 그런 것들이 쭉 이어져서 왔다. 당시 연극배우들은 스타 대우를 받았다.

지금은 대중에게 많이 알려지는 영화가 있어서, 영화배우들이 스타배우가 됐다. 그런 정신이 이어져 연극배우가 영화 하는 것에 내켜 하지 않았던, 그랬던 때가 있다. 내 기억엔 1990년 초·중반까진 그랬던 것 같다. 지금은 그런 경계의 선이 완전히 없어져 버렸다. 지금이 중요하니, 과거엔 그런 생각 하셨을 때도 있다. 영화는 영화배우가 하는 거고, 연극은 연극배우가 하는 생각을 했을 때가 있었다.

 

   
▲ 오달수 배우를 있게 한 스승, 연희단거리패 이윤택 예술감독(오른쪽)과 2010년 연극 '오구'로 연기 호흡을 맞춘 바 있는 김소희 연희단거리패 대표(왼쪽).

연기를 시작하게 만들어준 극단 연희단거리패 이윤택 연출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ㄴ 연극을 우연히 시작했다 하지만, 정말 '대가' 밑에서 시작했다. 큰 행운이었다. 가혹할 정도로 훈련을 시키셨고, 연기에 대한 개념을 정확하게 심어주신 분이다. 기초를 탄탄하게 닦을 수 있는 이윤택 선생님을 안 만났으면, (훌륭한 연출인들이 물론 있겠지만) 연극에 대한 정신을 아마 지금처럼 강하게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정말 은사님이다. 연극학교를 안 나왔는데도 이윤택 선생님을 2년 정도 만나고 나니 4년제 연극영화학과 졸업생 버금가는 배우가 됐다.

영화에선 '개' 역할만 20년 한 설정이지만, 실제 배우론 1990년대 주연 배우로 많은 무대에 섰다.

ㄴ 내 자랑 같지만, 이윤택 선생님의 애제자였다. 이른 나이에 연극 시작한 지 3~4년 만에 오영진 작가의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에서 '이중생' 역할을 맡았다. 그때 나이가 24살 정도였는데, 60대 노역을 해야 하니까 멋모르고 했었다. 이윤택 선생님은 그런 걸 보면서 "그게 바로 연극이다"라고 하셨다. "어린 네가 60대를 연기한, 그게 연극성이다"라고 하셨다.

내가 출연한 연극 중 대표작을 뽑자면 주인석 작가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다. 1인 7역인데, 옷을 갈아입고 나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1장 끝나고 암전되면, 어둠 속 그 자리에서 옷을 갈아입은 후 불이 켜지면 다른 데 있는 식이었다. 그런데 서로 약속이 잘못되어 옷을 안 갖다 줘서 엉뚱한 데 서 있던 적도 있었다. (웃음) 에피소드를 이야기하자면 밤새도록 이야기할 수 있다.

연극을 할 때 일찍 사랑을 받았다. 1997년 동숭아트센터에서 열린 '남자충동'이라는 극이 있다. 조광화 작·연출 작품인데, 목포 건달과 가족들 이야기다. 그 당시 센세이션한 작품이었다. 서울에서 공연하니까, 그 작품을 하기 위해서 부산에서 서울로 완전히 짐을 싸서 오게 됐다. 그렇게 작품을 하니 영화를 소개받게 되고, 그렇게 흘러와서 여기까지 와있다.

어떻게 영화로 넘어오게 됐는가?

ㄴ 2002년에 '해적, 디스코왕 되다'를 우연히 소개받고 하게 됐다. 당시 고선웅 연출의 '인류 최초의 키스'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연극계 아는 분이 소개해줘서 '해적, 디스코왕 되다'를 했다. 그걸 본 구자홍 당시 조감독이 '여섯 개의 시선' 박찬욱 감독 편에 추천해서 출연했고, 그다음에 '올드보이'를 찍게 됐다. '올드보이'를 찍은 후에 쭉 영화를 하게 됐다.

 

   
▲ 영화 '대배우' 포스터엔 실제로 그가 인터뷰한 내용이 카피로 쓰여 있다.

포스터에 '나는 단 한 번도 웃기게 연기한 적 없다'는 문구가 있다. 대중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나?

ㄴ 내가 실제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그게 카피로 갔는데, 잘 썼다고 생각한다. 코미디의 기본이 진지한 것이다. 상황이 우스꽝스러운 것이 재미난 것이지, 배우가 웃기려고 덤비면 정말 그거만큼 꼴 보기 싫은 상황이 없다. 그게 다 이윤택 선생님 밑에서 배운 것이다.

'로버트 드 니로보다 점 하나가 더 있다'는 홍보 문구는 어떠한가?

ㄴ 홍보 카피는 홍보팀에선 어떻게든 포장을 해야 하니까(웃음) 충분히 이해는 한다. 개인적으론 '감히'라는 말을 한다. 개인적으론 입에 올리지도 못할 카피가 나왔지만, 이해는 한다.

작품 속에 아내가 핸드폰 이름에 '대배우'로 저장한 장면이 나온다. 실제로 본인에게 '대배우'로 봐준 첫 인물은?

ㄴ 내가 대배우는 아니다. (웃음) 아무 곳에나 갖다 붙일 수 있는 호칭은 아니다. 한 4~5년 전쯤에 이윤택 선생님이 본인의 10권짜리 희곡 전집을 보내주셨다. '배우 오달수에게 이윤택이' 도장 꽉 찍어서 주셨는데, 감동적이었다. 유럽 쪽에선 배우라고 어지간히 해서 호칭을 안 해준다. 워낙 우리나라는 인심이 후하니까 해주신다. 이윤택 선생님이 아무한테나 '배우'라고 하지 않으신다. "누구야", "누구 씨" 이렇게 하지 배우라는 호칭을 함부로 쓰지 않으신다. 이윤택 선생님이 나한테 '배우'라는 호칭을 처음 써주신 분 같다.

"대학로 연극이 어렵다"는 말을 한다. 지난해엔 자살한 배우도 있다. 이에 대해 영화가 너무 긍정적이라는 생각도 있다.

ㄴ 1920~30년대 일본에서부터 '신극'이 들어오게 된다. 우리나라에 '신극'이 들어온 이후, 매년 그런 말을 한다. 작년에도 그랬고, 제작년에도 그랬다. "올해가 제일 힘들다." 연극을 하는 동안에 계속 그런 말을 듣고 살아왔다. 올해도 그런 말이 나오고 있다.

 

   
 

연극인들이 연극을 재밌게 만들면 왜 안 오겠는가? 연극인들의 책임도 있겠지만, 갈수록 연극에 대한 지원이 줄어들고 있다. 왜 그런지 이유를 정확하게 모르겠는데, 이상하게 연극 쪽보단 무용, 음악 등 다른 분야로 연극에 있던 예산이 깎여나가는 상황이 일어나고 있다. 이 자리를 빌려 이 기회에 국가에서도 문화 관련 정부 부처에서 연극에 좀 더 지원을 대폭 좀 올려야 할 필요가 있다.

1990년대 말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 연극영화과가 동국대, 중앙대, 한양대 등 5개 정도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숫자가 얼마나 될지 모를 정도로 많아졌다. 입학 경쟁률도 '더럽게' 세졌다. 그 학생이 졸업하고 대책 없이 대학로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학교나 정부나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데, 이건 무책임한 짓이다. 애들 4년 동안 등록금만 받아먹고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다. 요즘 젊은이들이 힘든데, 백수가 되기 쉬운 상황이다.

또 하나로 연극배우들이 자살도 하는 상황이긴 한데, 이건 잘못된 시각이라고 본다. 영화 속에선 연극을 하는 사람들이 좀 밝게 나온다. 궁핍하긴 해도 그걸 다 견디면서 밝게 살아간다. 자기가 좋은 일을 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언젠가 '먹고 살 만큼'의 분명한 기회가 올 것이라는 기대로 열심히 버티고 일을 한다.

만약 밝지 않다면, 대학로에 목매달아 죽은 사람 수두룩할 것이다. 다들 행복하게 잘살고 있다. 술값은 어디서 나오는지 하루도 안 빼먹고 술 마신다. 대학로 상인들도 미안한지 알아야 한다. 안줏값을 확 내려주던가. 배우들이 다 먹여 살리는 것이다. (웃음)

 

   
 

'대배우'가 주고 싶은 의미는 무엇인가?

ㄴ 아내의 핸드폰에 찍힌 것이 '대배우'다. 배우를 떠나서 내가 가장 외로울 때, 돌아보니 가족이 있구나 싶었다. 그런 게 '대배우'에서 읽혔으면 좋겠다. 김수영의 시 중에 '나의 가족'엔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냐'라는 구절이 있다. 그런 식으로 작품이 읽혔으면 좋겠다.

가족 때문에 연극을 포기하는 때도 있다.

ㄴ 연극을 하는 사람들이 이기적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그러므로 게으르면 안 된다. 아르바이트도 많이 해봤다. 주유소에서 새파랗게 젊은 가출 청소년과 기름도 짰었다. "기름 짜서 돈 받으면 뭐할래"하면 "오토바이 살 거예요"라고 말한 정신 못 차리는 아이들과 같은 방에 머물러서 일하기도 했다. 이기적이 되지 않으려면 부지런해야 한다.

내가 멘토로 삼는 배우가 주진모 선배님이다. '인류 최초의 키스'라는 작품을 통해 영화를 시작했는데, 당시 김상호, 주진모 선배님과 했었다. 주진모 선배님께 감명받은 것이 공연이 보통 7시 30분 정도 시작하니까, 그때까지 막노동을 하고 오신 것이다. 매일 신고 다니는 신발이 등산화셨는데, 시멘트를 묻히고 오신 후에 공연하고 술 진탕 드시고 다시 새벽 일찍 일하러 가시는 모습에서 많은 것을 깨달았다. 애도 둘인데, 연극 사랑하는 마음만큼 대단하셨다. 많이 배웠다. 좋은 말씀 다해주셨다. 귀동냥으로 연극 정신은 이렇게 들었다. 결론은 연극을 하면서 주변 사람에 폐 끼치지 않고 행복하려면, 부지런해야 한다.

 

[글] 문화뉴스 양미르 기자 mir@mhns.co.kr

[사진] 문화뉴스 서정준 기자 some@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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