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선웅 연출이 작품 연습을 지켜보고 있다. ⓒ 국립극단

[문화뉴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헬조선', '흙수저'다. 그 말을 하면, 그럼 한국에 살면 안 된다.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지난해 국립극단과의 첫 만남을 가진 작품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으로 제52회 동아연극상 연출상, 제8회 대한민국연극대상 연출상, 제5회 아름다운 예술인상, 제1회 한국연극연출가협회 올해의 연출가상 등 유수의 연출가상을 받은 고선웅 연출이 다시 국립극단에서 신작을 발표한다.

12일부터 28일까지 서울시 용산구 청파로에 있는 국립극단 소극장 판에서 열릴 '한국인의 초상'은 기존 연극 제작 방법을 탈피해 다큐멘터리와 즉흥극의 기법을 바탕으로 한 공동창작으로 선보여진다. 이 작품은 한국인의 단면을 담은 27개의 에피소드로 우리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단순히 어두운 면을 고발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 희망을 이야기한다.

고선웅 연출은 "한마디로 단정하기 어려운 한국인과 한국사회라는 주제를 다루는데, 한 명의 작가가 대본을 써서 완결된 구조의 희곡을 만드는 것은 옳지 않아 더 많은 사람의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지난 1월 연습 때부터 배우들이 직접 각자가 겪거나 주변인을 통해 들었던 이야기를 공유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긴 논의 끝에 연극적으로 구성할 수 있으면서도, 지금의 한국사회와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대변할 수 있는 이야기를 골라, 배우들이 각 에피소드의 내용을 바탕으로 즉흥연기를 펼친다. 10일 오후 국립극단 소극장 판에서 프레스콜이 열렸다. 하이라이트 시연 후 열린 기자간담회엔 고선웅 연출을 비롯해 전수환, 김정은 배우가 참석했다.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 연극 '한국인의 초상' 프레스콜 하이라이트 영상.

이번 작품은 어떻게 구성했나?
ㄴ 고선웅 : 김윤철 국립극단 예술감독께서 "국립극단이 자기 응시를 해야 한다"는 말을 하셨다. 동시대 벌어지고 이는 일들을 잘 쳐다보면 우리 스스로 개선하고 고쳐야 할 관점이 생길 것 같아, 이를 공유하면 좋겠다고 생각해 '한국인의 초상화'를 그려보자고 했다.

우리 시대에 '한국인의 초상'을 한 번 정밀하게는 못 그리더라도, 크로키처럼 그리면 무대라는 공간에서 펼쳐놓고, 팔짱 끼면서 보면 우리가 이렇구나고 생각해, 혹시나 자기 검열로 되돌아볼 수 있는 반성과 성찰의 계기를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의미 있는 작업이라 봤다. 쉽지 않은 작업인데, 이런 시도를 했다.

작가의 역할도 같이 맡은 두 배우에게도 소감을 듣고 싶다.
ㄴ 전수환 : 솔직하게 요즘 대한민국 모든 배우가 꼭 한번 해보고 싶은 고선웅 연출과 작업하자고 할 때 바로 작품을 하게 됐다. 극단 76에서 20년 동안 있어서, 이런 작업을 좋아하는데 재밌고 놀라웠다. 여러 배우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고선웅 연출이 훌륭한 작품을 구성해 올 줄 몰랐다. 최고라고 하는 데엔 다 이유가 있구나 했다. 오늘은 30분 보여드렸지만, 끝까지 다 보시면 작품의 완성도를 잘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김정은 : 전수환 선배님과 비슷할 것 같다. 공동창작을 처음 해봤다. 국립극단 시즌단원으로 있으면서, 주어진 대본으로 연기하는 것에 익숙했는데 공동창작 기회가 운 좋게 왔다. 요즘 핫하신 고선웅 연출과 함께해서 기쁘다.

많은 작품의 작가가 원하는 대로, 작가의 세계관을 표현하거나 수용하는 작업에 익숙해져 있는데, 즉흥을 해야 하는 공동창작에선 서로가 의견, 아이디어를 낸다. 물론 작가 고선웅 연출이 서술자로 정리하지만, 굉장히 진보적인 방식의 예술창작이었다. 신선하고 새로운 자극을 많이 받았다. 막이 어떻게 오를지 궁금하다.
 

   
▲ 김정은 배우(오른쪽)가 작품의 한 장면을 시연하고 있다.

공동창작 작업은 극공작소 마방진, 경기도립극단에서도 한 적이 있는 거로 안다.
ㄴ 고선웅 : 공동창작은 작가가 전지전능하지 못하기 때문에, 각자 살아온 인생의 내공, 경험치가 달라서, 이런 것이 함께 어우러질 때 나오는 엄청난 매력이 있다. 작업 자체가 녹록한 것은 아니지만, '한국인의 초상' 작업을 어떤 작가나 연출의 단일색으로 정리하면 편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러 나이를 나눠 캐스팅하고 그분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분들이 생각한 생각, 현재 삶에 투영된 인물들이 나오면 굉장히 자연스럽게 나올 것 같아 공동창작이 나왔다.

엘비스 프레슬리 곡이나, 영화음악가 엔니오 모리코네를 틀어주니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영화가 생각났다. 궁극적으로 사운드를 통해 어떤 것을 보여주려고 했나?
ㄴ 고선웅 : 음악은 느낌으로 작품 하면서 어떤 톤을 이렇게 저렇게 하기보단, 장면 구상이 구축되어가는 와중에 자연스럽게 넣게 된다. 영화가 떠오른 것도 중요하지만, 쓸쓸함 같은 것이 있었다. 음악의 정서를 그렇게 다뤘고,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작품엔 어울릴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한국인의 초상'이 작품적으로 진중하게 접근하면 가라앉고, 힘이 들 것 같아서 익숙한 음악을 잘 샘플링하면 좋겠다 생각했다. (음악 저작권 문제는 어떻게 됐나?) 당연히 시작부터 저작권료를 냈다.

'한국인의 초상'은 약간 부정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은데, 가공한 일은 거의 없고 있던 일을 보여주려 했다. 긍정적인 한국인의 삶이 왜 없겠는가, 다만 그걸 처음부터 보여줄 수 없었다. 연극적으로 도입부부터 행복한 이야기가 나오고, 중반부에서 해결되면 이야기가 안 된다. 초반에 부정적 측면이 나오는데, 그걸 환기하고 쳐다보자고 생각했다.
 

   
▲ 고선웅 연출이 기자간담회에 앞서 인사를 하고 있다.

'헬조선'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정확히 한국의 어떤 점을 보여주고 싶은가?
ㄴ 고선웅 :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헬조선', '흙수저'다. 그 말을 하면, 그럼 한국에 살면 안 된다.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작품에 부정적인 이야기가 나오지만, 희망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싶은 것이 내 마음이다. 20~30대 수입이 감소했다는 뼈아픈 기사를 봤는데, 정말 가슴 아프다. 그것을 어떻게 쳐다보고, 선택을 해야 할지에 대한 숙제를 공감하는 연극이었으면 좋겠다.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연극이 의미가 있겠다고 봤다. "어렵고, 곤란하고, 뼈아픈 우리 현실이 이렇잖아"라기 보단 우리가 더 희망을 이야기하자는 역설을 보여주고 싶었다.

배우들의 의상 소매엔 무지개가 있다. 어떤 의미인지 궁금하다.
ㄴ 고선웅 : 무지개가 가지고 있는 의미가 있다. 한국사회를 하나로 규정한 색깔로 보여줄 수 없어서, 정신 사납게 무지개를 선택하게 됐다.

정재진 배우의 10대 연기가 낯설기도 하다. 직접 아이디어를 낸 것인가?

ㄴ 고선웅 : 정재진 선생님 삶의 경험담이 어마어마하게 많다. 이야기보따리를 풀면 엄청나게 많다. 젊었을 때 가출한 기억 등 여러 모티브가 있다.
 

   
▲ 정재진 배우가 10대 청소년 연기를 선보인다.

직접 아이디어를 낸 아이템이 있다면?
ㄴ 전수환 : 50이 넘었는데, "50은 모퉁이 돌아가는 나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어제 해봤다. 예전에 서해안 올레길 같은 곳에 갔는데, 모퉁이를 돌아가는 데 불안하게 떨어질 것처럼 돌아갔다. 돌아서니 바다가 확 보이는데, 50을 잘 살면 그럴 것이고, 잘 못 살면 바다가 아닌 절벽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적으로 배우가 50대 되면 쓰임새가 점점 없어진다. 배우는 선택받아야 일할 수 있는데, 선택의 폭이 좁아진다. 비탈길의 불안함이 생각나고, 이 작품에서 연극을 어렵게 하면서 이것저것 해본 일들이 많다. 후배 배우도 다 그렇지만, 대리, 택시, 심지어 청소년들한테 지나가 다 맞은 일들이 실질적으로 있었던 일이다.

우리 삼촌이 설 쇠러 오다가 10대 아이들한테 맞아서, 병원에 간 적이 있었다. 대여섯 명이 때리러 오니까, 지갑을 주면 되는데 삼촌이 해병대 나왔다고 하니 엄청나게 맞았다는 이야기를 넣어보자고 했다. 배우들이 이렇게 낸 아이디어로 구성해서 집어넣으니 놀랍고 대단한 연출이었다.

다음 작품을 같이 하자는 건 절대 아니다. (웃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어제 이세돌 기사가 졌는데, 우리 작품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사람의 역할이 어디까지일까? 울렁이는 낭만을 보여주려고 한다.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무대의 낭만을 공연 통해 지키고 싶다.
 

   
▲ 배우 전수환이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김정은 : 내가 나오는 장면이 내 연령대에 맞는 이야기다. 아직 미혼이라 부부 사이에 같이 있어도 혼자 있는 것을 체험하지 못해도 결혼한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불륜 저지르는 남편 등 치명적 부분을 들어서 그 부분이 도움됐다. 직접 다른 선배님, 후배님처럼 대리 경험은 없었어도 어린 친구가 임신하는 일 등 사회 곳곳에서 나오는 내용이 고통스럽지만, 도움이 되면 어불성설인데 간접적 경험도 배우에겐 직접적 경험만큼 중요하다고 본다.

국립극단 시즌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준비 과정에서 호흡은 어땠나?
ㄴ 김정은 : 시즌단원들끼리 같이 호흡 맞춘 배우들이 몇몇 있지만, 다른 분들은 처음 만나는 분이고 연출과는 첫 작업이다. 길지 않은 연습 기간이라 노파심 가지고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서로 눈 맞춤부터 시작해 유대감도 생길 수 있도록 하는 데엔 연출의 몫이 컸다. 처음부터 배우들이 서먹한 자리를 술자리를 갖거나 해서 푸는데, 그런 시간보다 연출님은 자기 먼저 웃통을 벗고 습자지에 물이 배듯이 쑥쑥 다가오신다.

그래서 격 없이 진행했다. 굉장히 유머감각이 많으시다. 유머는 연극 작업에서 아주 소중한 부분이다. 이렇게 웃겨주는 연출 만났으니, 웃음꽃 피울 수 밖에 없는 연습실이었다. 작업을 놀이처럼 하는데, 연극은 행복해야 한다. 불행이 뚝뚝 떨어지면 안 된다. 재밌게 놀다가면서 감동을 주는 것으로 동의했다. 서로서로 어려운 시간이 많이 줄었던 것 같다. 호흡도 그렇고, 짧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면 된 것 같다고 서로 감사하게 작업 중이다.

무대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를 해 달라.
ㄴ 고선웅 : 소극장 판이 이 작품에 어울리는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한쪽만 할까, 삼면만 할까 했다가 사면 다 했다. 여기에 소품 챙기는 것도 보여주면 좋아 보였다. 바닥은 우리 길바닥에서 보는 것이다. 거울은 '초상'이니까 있으면 좋겠다고 봤다. 옆엔 차벽도 있는데, 화백님께서 직접 오셔서 드라마를 보신 후에 그려주셨다. 모두 작품에 나오는 이야기다. 동트면 장면에서 무대에 공을 들인 미장센도 있다. 서양의 '생각하는 사람'은 고민을 풀려고 하면, 무대에 있는 '반가사유상'은 생각을 내려놓는 느낌이 있다. 생각 내려놓고 실천을 바로 하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 무대의 한 쪽엔 반가사유상이 등장한다.

어떤 작업이 가장 어려웠는가?
ㄴ 고선웅 : 제가 초상을 그렸는데, 아무도 '한국인의 초상'을 보고 싶어 하지 않고, 이게 무슨 '한국인의 초상'이냐고 할 것 같은 우려를 했다. 작업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생각과 관점을 통일해 그려낸 '한국인의 초상'이 될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꾸며가면 선보이기가 굉장히 어렵다. 벌어지는 일들이 워낙 많아 정치적인 부분은 뺐다. 다른 부분은 인터넷, 뉴스, 경험 등으로 보고 느낀 것을 저희끼리 한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인 거 넣으면 분란이 생긴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공통의 관심사로 정치는 안 그래도 말을 하는데, 연극에서 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27개 에피소드는 본능적으로 나온 것이다. 장면이 많고, 인물이 한계가 있고 A에서 B장면으로 넘어갈 때 소품 준비하고, 음악이 나오는 톤의 밸런스를 맞추고 약속하려면 연극적인 해법에 따라 할 수밖에 없었다. 아쉬운 장면도 많은데, 호흡과 템포가 맞지 않았다. 그래서 1시간 25분 정도만 하려고 했다.


▲ (왼쪽부터) 배우 김정은, 고선웅 연출, 배우 전수환이 마무리 인사를 하고 있다.

문화뉴스 양미르 기자 mir@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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