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피닉스 창단시 극대화. IMF 이후 급격히 쇠퇴

▲ 월드 파워 쇼케이스 국내 대회를 주관한 김용달 코치. 실업야구 한국전력을 거쳐 MBC 청룡 원년 멤버로 프로에 합류한 바 있다. 사진ⓒ김현희 기자

[문화뉴스 MHN 김현희 기자] 지난해 12월, 모 언론사를 통하여 야구계에서 반길 만한 소식이 전달된 바 있다.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이하 '협회')를 중심으로 실업야구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는 것이 주된 보도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직 구체적으로 시행된 것은 하나도 없다. 되려 협회나 대한체육회 차원에서 정리해야 할 문제가 상당히 많다. 다만, 프로야구 취업률이 10% 내외에 이르는 현 상황에서 이러한 논의 자체가 이루어진 것에 큰 의의를 둘 필요는 있다. 2002년을 끝으로 명맥이 끊긴 실업야구가 부활할 경우 학생 야구 선수들이 선택할 수 있는 폭이 한층 넓어진다는 점까지 가볍게 봐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이에 문화뉴스 스포테인먼트팀은 지난해 12월 19일, 야구 팟케스트 방송 '주간야구 왜(권순철 PD, 이창훈-김원식 아나운서 진행)'를 통하여 실업야구에 대한 각종 이슈들을 선정하여 라디오 녹음을 진행한 바 있다. 당시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밝혔던 실업 야구에 대한 이야기를 본 고에서 다시 떠올려 보고자 한다. 1편은 실업야구의 역사와 태동, 그리고 현대 피닉스와 관련된 이야기로 구성됐다.

실업야구의 역사와 태동,
탄생 계기와 당시 스타 플레이어들은?

사실 실업야구의 시작을 언제로 보느냐에 따라서 그 역사를 일제시대 이전으로 보느냐, 이후로 보느냐로 나눌 수 있다. 일제시대 이전으로 보는 근거는 1904년에 창단된 황성 YMCA다. 휘문의숙(휘문고교 전신), 경성고보(경기고교 전신), 연희전문(연세대 전신), 보성전문(고려대 전신) 등 학교 야구부가 대세였던 일제 시대에 강호 황성 YMCA의 존재는 한국 야구의 시점을 알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실업야구의 핵심이기도 한 '야구를 통하여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체계'가 정확하게 확립되지 않았다. 따라서 황성 YMCA가 아닌, 해방 이후 경향신문 주최로 백호기 대회가 열렸을 때를 실업야구의 시작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초창기에는 육군을 중심으로 군(軍) 팀들이 강세를 보이다가 남선전기(한국전력 전신), 농협중앙회, 교통부 및 상업은행, 한일은행, 제일은행, 크라운맥주, 롯데, 한국화장품, 포스콘 등이 나란히 창단하면서 실업야구의 중흥을 이끌었다. 물론, 1970~80년대에는 고교야구의 인기가 최고였지만, 이들이 졸업한 이후에는 실업팀이 그대로 고교/대학야구 스타들을 끌어 안으면서, 그 인기를 이어갔다. 야구의 프로화를 생각할 수 없었던 시절, 실업야구가 지금의 프로야구 역할을 했었던 셈이다.

특히, 당시 재일교포 출신이면서도 국내에 영구 귀국하여 수준 높은 야구 실력을 선보였던 선구자들의 존재가 실업야구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바 있다. 교통부와 기업은행에서 뛰었던 김성근 전 SK 감독을 비롯하여 역시 교통부에서 뛰었던 투수 배수찬, 한일은행에서 뛰었던 김영덕 전 빙그레 이글스 감독 등이 바로 그러한 주인공이었다. 한동화(전 신일고 감독), 김소식(전 MBC 야구 해설 위원) 등 야구 원로들 역시 이 시기에 활동했던 스타 플레이어들이었다. 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 실업야구 팀으로도 창단한 바 있었던 롯데의 최동원도 1970년대 실업야구를 이끈 주인공. 이후 그의 역투는 1984년 한국시리즈까지 어이지며, 명불 허전임을 증명해 보였다. 또한, 프로에는 입단하지 않았지만, 경북고등학교의 황금사자기, 청룡기, 봉황대기, 대통령배 4연패를 이끈 투수 남우식도 이 당시 실업야구 멤버였다. 현재 주식회사 푸르밀(옛 롯데우유) 대표이사로 수년 째 재직중이다.

그렇다면, 프로야구의 압도적인 인기로 인해 관심이 덜했던 실업야구가 8, 90년대에 명맥을 유지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대학 졸업 이후 프로보다 직장에서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싶어 하는 선수들의 수요가 있었다는 점, 그리고 공중파 9시 뉴스 이후 진행되는 스포츠 뉴스에서 꾸준히 실업야구 소식을 전달하는 등 매스컴을 통한 기업 홍보 효과 등이 컸기 때문이다. 사실 80~90년대에는 야구 뿐만이 아니라, 축구 역시 '할렐루야'를 필두로 실업팀이 명맥을 유지했던 시기였다. 또한, 할렐루야 축구단의 황득하 선수처럼 프로 진출을 제의 받았음에도 대부분 안정적인 직장 생활을 병행하고 싶어 이를 고사하는 선수들도 분명 있었던 시기였다. 故 장태영 선생처럼, 금융권을 중심으로 기존 야구선수 출신의 은행장들이 적지 않았다는 점도 야구 선수들에게는 호재였다. 즉, 80년대 까지만 해도 한국화장품 등지에서 실업야구 선수 생활을 하다가 프로에 입문한 사례도 꽤 발견되곤 했다.

현대 피닉스의 등장과 퇴장

▲ 신일고 사령탑 시절의 강혁 감독(맨 우측). 실업팀 현대 피닉스에 몸담았던 야구 천재이기도 했다. 사진ⓒ김현희 기자

그런데, 실업 야구가 매력적이었던 또 다른 이유는 당시까지만 해도 프로 선수들이 태극마크를 획득하는 일이 상당 부문 제한됐기 때문이었다. 이에 안정적인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올림픽과 같은 큰 국제 무대에 참가할 수 있는 방법으로 실업야구만 한 것도 없었던 셈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맞추어 실업야구의 커다란 변혁을 이끈 사건이 발생했다. 1994년 창단된 현대 피닉스가 그러했다.

1990년대 중반 당시, 현대 그룹은 프로야구 창단을 꾸준히 모색해 왔었지만, 이것이 여의치 않자 실업야구 피닉스 구단을 창단했다. 당시 현대그룹 계열사 CEO 출신이었던 이현태 대한야구협회장의 적극적인 지원도 한 몫 했다. 이에 피닉스는 이듬해 대학을 졸업하는 거물급 선수들을 대상으로 애틀랜타 올림픽 참가와 병역 문제 해결이라는 당근을 제시하여 A급 신인들을 대거 영입했다. 당시 최고 유망주로 평가받았던 연세대 에이스 문동환, 같은 학교의 거포 안희봉, 고려대 거포 조경환, 한양대 천재 타자 강혁 등이 바로 그러한 이들이었다. 실제로 애틀랜타 올림픽 야구 대표팀 엔트리 중 대학 선수 외의 대부분은 현대 피닉스 선수들이었다. 거액의 계약금과 태극마크, 그리고 이를 통한 병역 문제 해결, 안정적인 직장 생활 등이 두루 가능했다는 점에서 많은 유망주들이 피닉스를 선택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2년 후 묘한 상황이 발생했다. 1995 시즌 직후 프로야구팀 태평양 돌핀스를 현대 그룹에서 인수하게 된 것이다. 1996년 현대 유니콘스로 창단이 바로 그것. 같은 그룹에 야구단이 공존하면서 피닉스의 입지가 순식간에 좁아졌던 것이다. 그 후 현대 피닉스는 모기업이 현대전자에서 현대해상으로 바뀌어 명맥을 유지하다가 2000년 이후 모든 아마추어 실업 야구 팀이 해체되는 분위기 속에서 2002년에 최종 해체됐다. 안타까운 것은 현대 피닉스 출신으로 프로 야구계에 진출하여 성공한 선수는 극히 드물었다는 사실이다. 투수 문동환, 타자 조경환과 강혁이 나름대로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그 외 선수들은 대부분 프로와 아마추어의 수준 차이로 인하여 잘 적응하지 못하고 현역에서 대부분 물러나는 경우가 많았다.

- 2편에서 계속 -

※ 주요 테마 및 질문 제공 : 네이버 라디오 팟케스트 '주간야구왜' 권순철 PD

eugenephil@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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