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고 보조 코치로 지도자 시작.... 10년 만에 경상중 감독 올라

▲ 대구 경상중학교에서 만난 차정환 감독. 차 감독은 2005년 교육학 석사 학위 취득 이후 10년 만에 감독 자리에 오르게 됐다. 사진ⓒ김현희 기자

[문화뉴스] "야, 이제 우리 어떻게 살아야 하나?"

술잔을 기울이는 두 사내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꿈같은 대학 생활이 끝나고, 내일모레면 '청운의 꿈'을 꿨던 두 이는 이제 현실의 벽에 부딪혀야 한다. 전공상 취업 시장의 문도 제한되어 있었다. 가야 할 곳은 단 한 군데, 바로 푸른 빛이 물들어진 운동장그라운드 뿐이었다. 그렇다. 이들은 같은 대학에서 야구를 했던 이들이었다. 영남대학교 99학번으로 야심 차게 대학 야구에 뛰어들었지만, 프로의 눈은 두 이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다행히 그중 하나는 두산 베어스의 부름을 받아 뒤늦게 프로에 입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그이는 국가대표 톱타자를 맡으며 2008 베이징 올림픽 우승을 견인했고, FA 자격을 얻은 뒤에는 NC 다이노스로 이적하면서 자신의 몸값을 극대화했다. 이종욱(36)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그렇다면, 이종욱과 술잔을 같이 기울였던 또 한 명의 사내는 어떻게 되었을까?

'보조에서 주역으로', 인간 승리의 주인공, '차돌' 차정환 감독 이야기

미래에 대해 고민하던 그는 더 깊은 방황에 빠질 법했지만, 그 기간이 절대 길지 않았다. 야구로 더는 안 되겠다 싶었던 그는 과감하게 대학원 진학을 선택했다. 현 경상중학교 감독, 차정환(35)의 지도자 인생은 그렇게 시작됐다.

대구중-대구고를 졸업한 차정환은 천상 야구를 위해 태어난 이였다. 스승인 박태호 감독(현 영남대 사령탑)이 하나를 가르쳐 주면 둘, 셋을 응용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배운 것은 어떻게든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기 위해 남들보다 더 많이 뛰어다녔다. 그러나 누구의 표현대로, 신(神)은 그에게 야구에 대한 열정은 줬어도 타고난 재능은 부여하지 않았다. 가난한 집안 사정을 고려했을 때 그는 반드시 야구로 성공해야 했지만, 그 재능이 '프로가 원하는 수준'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를 지켜본 모든 이들은 차정환의 '성실함'까지 가볍게 평가했던 것은 아니었다.

결국, 그는 고교 당시의 성실함을 인정받아 영남대에 진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학에 진학했을 때 그는 수업은 수업대로 참가하고, 대회는 대회대로 뛰면서 '학생 야구 선수의 모범'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기도 했다. 주위에서는 '그게 가능하겠느냐?'라고 말리기도 했지만, 대학 4년 내내 차정환은 단 한 번도 이 결심을 꺾지 않았다. 그래서 대학 졸업 이후 교육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에도 그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노력하며 석사 학위를 따는 데 성공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차정환은 모교를 찾았다. 지도자가 될 생각으로 대학원 등록까지 했던 터라, 그것을 실전에 적용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했다.

스승인 박태호 감독은 차정환을 받아들였지만,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대구고에는 두 명의 코치가 있어 차정환까지 '정식 코치'로 임명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말 그대로 '무보수 보조 코치'였던 셈이다. 그러나 차정환은 세상 탓을 하지도, 누구를 원망하지도 않았다. 그는 가장 먼저 그라운드에 나와 가장 늦게 학교를 떠났다. 대학원은 대학원대로 다니면서 후배들을 지도하는 일에도 인색하지 않았다.

▲ 경상중학교 3학년 선수들. 이들이 내년 시즌 경상중학교를 이끌 주역들이다. 사진ⓒ김현희 기자

그러던 어느 날, 박태호 감독이 차정환을 불러 무언가를 '툭' 던졌다. 어리둥절해 하는 차정환에게 박태호 감독은 "2천만 원 마이너스 통장이니까 쓸 만큼 쓰고, 돈은 나중에 천천히 갚아라."하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차정환의 어려운 가정 형편을 마음에 둔 박 감독의 작은 배려였다.

"감독님과 권영진 코치님께서 주신 돈으로 어머니께서 김밥집을 여실 수 있었습니다. 정말 어려울 때 요긴하게 썼죠. 돈은 다 갚았지만, 은혜는 정말 평생 갚아도 모자를 겁니다. 아버지나 다름없죠." 차정환은 박 감독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러나 정작 박 감독은 이에 대해 "그거에 대해 차정환이 너무 마음 쓰는 것 같은데, 그럴 필요가 없다. 솔직히 다른 사람이었으면 선뜻 돈 내어주지도 않았을 거다. 차정환이니까 내가 믿고 줬던 거다."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도 했다.

이후 교육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차정환이 향한 곳은 경주고등학교였다. 이에 대해 차정환은 "박태호 감독님께 더 배워야 할 것이 많다."라며 한사코 정식 코치 자리를 거절했다. 그러나 박태호 감독은 "본인의 미래를 위해서는 반드시 정식 필드 코치로 뛰어봐야 한다."라며 기어이 그를 경주고 코치로 보냈다. 대우는 나아졌지만, 차정환은 늘 '박태호 감독님께 은혜를 평생 갚아야 한다.'라는 생각을 지우지 않았다.

차정환 특유의 성실함은 경주고에서도 이어졌다. 화랑대기에서도 4강에 오르며 가시적인 성과를 냈다. 그러기를 2년 반복했다. 그러나 해체 위기 속에 더 이상 경주고에 자리할 수도 없었다. 결국, 그는 다시 모교를 찾았고, 박태호 감독 역시 돌아온 제자에게 따뜻한 손길을 보냈다. 이후 그는 기간제 체육 교사직을 병행하면서 야구부를 지도했다. 대학원에서 교원 자격증을 획득했던 것이 도움이 됐던 것이었다. 하지만, 기간제 교사가 끝나면서 다시 미래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이제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나이에 접어들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때 차정환을 부른 이가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그이는 바로 김민호 감독이었다. 부산고 사령탑으로 취임한 이후 김 감독은 주저 없이 차정환을 불렀다. 이유는 간단했다. 차정환의 성실함은 높이 샀기 때문이었다. 차정환은 까맣게 몰랐지만, 롯데 타격 코치 사임 이후 잠시 대구고를 찾은 김민호 감독은 당시 보조 코치였던 차정환을 눈여겨봤다고 한다. 그렇게 고향을 떠나 부산으로 향한 차 코치는 열과 성을 다하여 선수들을 가르쳤다. 그 과정에서 화랑대기 우승, 청룡기 4강이라는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더 큰 수확은 따로 있었다.

"창의적으로 야구하는 방법에 대해 김민호 감독님께 많이 배웠습니다. 실제로 김 감독님은 작전을 걸 타이밍에도 그냥 강공으로 밀어붙이십니다. 야구는 선수들이 하는 것이고, 그 안에서 선수들이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한다고 믿으시기 때문입니다." 차정환의 회상이다.

이후 박태호 감독이 대구고를 떠나 영남대 사령탑으로 적을 옮기자 차정환도 기꺼이 스승을 따랐다. 대학에서 다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그는 포수 김영덕, 내야수 최승민 등의 성장에 큰 영향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 2015년 말, 차정환은 우연히 '감독 모집 공고'를 보게 됐다.

"경상중학교에서 야구부 감독을 모집한다는 공고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 하다가 박태호 감독님께 '모집 공고 났으니, 원서나 한 번 넣어보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고 공고에 응했죠."

결과는 합격이었다. 2005년 교육대학원 석사 학위를 받은 이후 10년 만에 감독직에 오른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합격하고 나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부모님도 모르셨습니다. 박태호 감독님하고 제 아내에게만 알렸죠. 그것 때문에 다른 지인 분들에게 정말 혼도 많이 났습니다(웃음)."

합격 과정도 지극히 '차정환다운' 모습이었다. 전임 감독이 이루어놓은 업적을 제대로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감독 취임도 그저 '조용히' 마무리했다. 이제 남은 것은 본인의 멘토인 박태호/김민호 감독에게서 배운 '선수 지도의 정석'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러나 머지 않아 차정환은 더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박태호 감독님은 쉬는 날에도 학교를 나오십니다. 코치 시절에는 왜 그러시나 싶을 때도 많았지만, 제가 감독이 되고 나니 비로소 두 감독님께서 왜 휴일에도 학교를 나오시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제가 첫 출근 날, 밤 11시 반에 퇴근을 했습니다. 하루종일 박태호 감독님 생각이 나더군요. 밤 11시에 박태호 감독님께서 전화하셔서 '감독자리 돼 봐야 한다는 것, 이제 직접 되어 보니까 알겠지?' 하시는데, 정말 공감 많이 됐습니다. 코치 때는 몰랐는데, 감독님 정말 대단하셨구나…. 라는 것을 최근 들어 뼈저리게 느끼게 됐습니다."

▲ 경상중 코칭 스태프. 차정환 감독과 함께 경상중학교를 이끌 조연배우들이다. 사진ⓒ김현희 기자

그러나 감독 자리에 오른 이상, 그도 남다른 각오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감독 부임 이후 차정환의 지도 방식'을 묻는 질문에 차 감독은 주저 없이 '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우승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성적도 중요하죠. 그러나 중학 야구에서는 환경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운동장 분위기가 딱딱하고 경직되면, 선수들은 수동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운동장 분위기가 밝아야 자기 의견을 적극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능동적인 선수가 될 수 있습니다. 직장인도 직장 가는 길이 즐거워야 일하는 맛이 나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학생 야구 선수들도 학교에 오는 것을 즐거워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인지 경상중학교 야구부 코칭스태프들은 질책보다는 격려와 칭찬을 많이 한다. 연습 도중 베이스러닝으로 아웃된 선수를 향해서도 "괜찮아! 그렇게 하는 거야! 적극적으로 하는 모습 좋아!"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간혹 목소리 톤이 높아지는 경우에는 선수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이건 너희들을 긴장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해하지 마라. 임펙트 있게, 강하게 해 줘야 할 부분은 우리가 이렇게 큰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것이니까 모두 집중하면 된다.'라고요. 그래야, 분위기가 경직되지 않고, 선수들도 오해를 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리 생각합니다. 그라운드에서 수동적인 선수들은 고교, 대학교에 가도 똑같이 된다고요. 야구는 창의력이 부족하면 안 됩니다. 저는 이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래서일까? 경상중학교는 연습에 '학년'이 없다. 1~3학년 모두 적극적으로 훈련에 임한다. 경기는 3학년 위주로 편성한다 해도 연습만큼은 '지켜보기만 하는 선수'들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차정환 감독의 지론이다.

"학교를 다니는 것과 야구를 하는 것은 정말 창의력 있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친구들이 고교에 진학할 때 고교 감독님들이 '어, 너 참 중학교 때 예쁘게 야구 배워 왔다.'라는 이야기를 듣게 하고 싶습니다. 제 최종 꿈이요? 어떠한 인연으로 만났건 간에 저를 기억하는 모든 제자들이 저 차정환이를 '괜찮았던 선생님이었다.'라고 기억하게 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2009년에 국가대표 보조 코치 자격으로 경험했던 '태극 마크'를 다시 달고 싶다는 의욕을 드러내 보이기도 했다.

"태극 마크는 제 영달을 추구하기 위해서 달고 싶은 것이 절대 아닙니다. 제 아내, 그리고 두 딸을 위해 나중에라도 기회가 되면 꼭 달고 싶습니다. 나중에 제 딸들이 성장하고 나서 누군가 '아버지 뭐 하셨던 분이냐?'라고 물으면 '국가대표 코치/감독이셨다.'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딸 앞에 자랑스러운 아빠, 아내 앞에 자랑스러운 남편이 되고 싶습니다."

2016시즌을 기점으로 감독으로 새 출발을 하는 차정환. 그의 지도 철학이 대구 지역을 넘어 전국으로 확산되는 그날을 기대해 본다. 아울러 차정환 감독 앞날에 좋은 일만 가득하기를 기원한다.

차정환(경상중학교 감독)
1. 생년월일 : 1981. 2. 20
2. 학력 : 대구중-대구고-영남대-영남대학원
3. 주요 약력
  - 2005 석사학위(논문명 : 고등학교 및 대학교 야구선수의 코치 리더십 선호도 분석)
    대구고 야구부 보조 코치 겸임
  - 2006 경주고 야구부 타격/주루코치
  - 2007 대구고 체육교사 겸 야구부 보조 코치
  - 2008 부산고 야구부 타격/주루코치
  - 2011 영남대 야구부 타격/주루코치
4. 특이사항 : 박태호 감독 제자 중 감독 임명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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